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한겨레 자료사진
이우진ㅣ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지나온 여름은 특이한 사례로 기억될 것 같다. 때 이른 더위가 한달여 이어진 후에는, 반전하여 소나기가 자주 내리더니 막바지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심심찮게 이어졌다. 우리나라 북동쪽에 형성된 고기압부가 오래 버티면서, 무더운 고온 패턴이나 강수가 잦은 패턴이나 한번 시작하면 한동안 유지되었다. 상대 진영에서 날아온 배구공을 블로킹해내듯이 동서 방향의 기류 흐름이 막혔던 것인데, 최근 기압계 흐름이 점차 원활해지면서 블로킹도 약해진 느낌이다.
소나기가 갑자기 내리거나, 궂은 날씨가 반복되면 아무래도 야외 활동이 위축된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목가적인 산골 풍경이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에서 찍었는데, 당초 6주 정도면 끝날 촬영 일정이 11주까지 늘어졌다. 잘츠부르크의 잦은 비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천혜의 기후를 빼놓을 수 없다.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에 속해 겨울철을 제외하면 연중 비가 적고 맑은 날이 많아 영화를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전통적인 서부 활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태양과 파란 하늘 아래 확 트인 평원과 이국적인 선인장, 오묘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 사이로 말들이 시원하게 달린다.
영화에서는 극 중 분위기가 반전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예고하거나 감정을 고조시키는 장치가 쓰인다. 효과음악은 시종일관 극의 흐름에 따라 분위기를 맞춘다. 날씨도 음악처럼 감정이 떠오르게 한다. 비 오는 날에 벅차오르는 행복의 감정을 느끼거나, 상실의 감정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추억의 색깔에 따라 날씨에 입혀지는 감정은 다르겠지만, 영화 속의 날씨가 극 중 장면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연인들이 헤어질 때는 비가 와서 애잔한 분위기를 불러내고, 순진무구한 사랑을 노래할 땐 함박눈이 내리는 시골길에서 눈싸움을 한다. 뭔가 좋지 않은 사건이 임박했을 때는 후덥지근한 더위에 세찬 비가 들이치거나, 한밤중에 벼락이 치고 강풍이 분다.
한 편의 드라마에는 희로애락의 인생사가 들어 있는 만큼, 날씨도 거기에 맞춰 달라져야만 한다. 그렇다고 극 중 흐름에 딱 맞는 날씨가 오기를 기다리며 무작정 대규모 스태프와 장비를 대기시킬 수는 없다. 세트장에서 날씨를 만들어내 극 중 감정을 효과적으로 시청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1940년대 미국 영화 <멋진 인생>에서는 성탄절을 앞두고 착하게 살아온 가장이 한순간에 부도의 위기를 맞고 다리 난간에서 중대한 결심을 하려는 순간, 밤송이만 한 함박눈이 내리면서 분위기가 반전한다. 지나온 삶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게 해준 그 눈은 소화기에서 쓰는 화학물질에 비누와 물을 섞어 빚어낸 것으로 얼음 재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요즈음은 컴퓨터그래픽을 접목하여 태풍과 함께 산만 한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와 도시를 삼켜버리는 장면이나, 토네이도가 지상 위의 모든 것을 빨아올리는 장면도 일기를 예측하듯 컴퓨터로 계산하여 시뮬레이션 해낸다. 하지만 몇 세대만 거슬러 가도 대형 세트장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들어야만 했다. <허리케인>(1937)에서는 남태평양 해변에 길이 200m짜리 세트장을 설치하여 2대의 항공기 프로펠러로 바람을 일으키고, 8㎝ 소방용 호스로 폭우를 쏟아냈다. 배우가 야자수 나무에 붙들려 있는 동안 드럼통 40개를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내 밀려오는 태풍 해일을 연출했다.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는 세트장에서 현실 속의 날씨를 만들어내려고 복잡한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하는 데 엄청난 재원과 노력을 쏟아붓겠지만, 청중의 입장에서는 영화 속의 날씨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껏 극 중 분위기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