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부동산 중심 금융과 주택시장 안정화

등록 2021-09-12 21:25수정 2021-09-13 16:12

[기고] 하준경ㅣ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사과나 배를 돈으로 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너도나도 사과·배를 심어 온 나라가 과일밭이 될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내구성이 없어 저축하기도 어렵고 공급이 곧 크게 늘어 가치가 떨어질 게 뻔한 상품을 돈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금같이 희소한 귀금속은 괜찮을까. 금은 수량이 제한적이라서 경제위기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탄력적으로 공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대의 화폐와 신용은 국가 공권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자산들을 담보로 창출된다. 한국에선 이 자산의 대표가 바로 주택이다. 선진국에서 신용창조, 즉 자금공급이 주로 기업가치와 국채를 담보로 이뤄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처럼 토지가치가 국부의 절반을 넘고 부동산이 가계자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선진국은 찾아보기 어렵다.

개도국을 벗어난 나라가 부동산을 신용창조의 주된 원천으로 삼는 것은 큰 문제다. 지식과 기술, 기업가정신을 담보로 신용이 창조돼 돈이 공급되면 인재양성, 기술혁신, 기업성장이 촉진되지만 땅이 있어야 대출이 나가면 땅주인이 부를 차지하고 국민들은 부동산 투자에 몰두하게 된다.

심하게 얘기하면 한국의 화폐금융은 ‘부동산본위제’가 돼가는 모습이다. 서울의 평범한 아파트가 연봉의 10배가 넘는 신용을 창조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무엇보다 초저금리와 유동성 확대가 부동산 중심 금융관행과 결합한 결과다.

원래 초저금리는 코로나로 고통받는 기업과 가계를 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돈의 물꼬가 부동산 쪽으로 트여 있다. 대출규제로 돈 흐름을 조절하려 해도 한국엔 전세대출이라는 큰 구멍이 있다. 전세금은 금리와 반비례하므로 금리가 제로에 다가가면 전세 호가는 이론적으로 무한히 치솟을 수 있다. 높아진 호가에 맞춰 선진국들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큰 금액이 쉽게 대출된다. 국가가 보증까지 해주니 은행들은 위험부담 없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수익을 올린다. 대출심사나 자율규제를 제대로 할 유인이 없으니 금융기관으로서는 규제가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대출을 늘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쉬운 대출로 쉽게 높아진 전세가는 다시 매매가를 높인다. 게다가 느슨한 신용대출은 전세 끼고 집 사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부동산 보유비용도 낮다. 부동산의 금융화, 투자자산화를 넘어 물가상승기의 저축수단화, 화폐화를 위한 탄탄대로가 닦여 있는 셈이다.

주택이 사과나 배처럼 공급될 수 있다면 전세가와 매매가가 곧 안정되고 부동산의 금융화도 심해지지 않겠지만 주택 공급엔 애로가 많다. 좋은 위치의 땅은 별로 없고 공급을 늦추는 이해관계는 너무나 많다. 초저금리를 유지하고 규제를 다 풀면 주택이 사과·배처럼 생겨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라면 애초에 부동산이 금융의 중심, 돈의 원천이 되는 나라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장의 기대를 안정화하기 위해 주택 공급은 원만히 추진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를 다 풀긴 어렵다.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고 주택시장을 안정화하려면 무엇보다 화폐금융의 무게중심을 부동산으로부터 생산적 활동으로 옮겨야 한다. 우선 돈의 큰 흐름을 좌우하는 금융규제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소득과 가계대출, 집값의 핵심 연결고리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보면, 대다수 선진국이 이 비율을 30~40% 수준에서 엄격히 관리하지만 한국은 전세대출, 제2금융권 등 예외가 너무 많다. 금융기관들이 위험을 공정히 부담하고 부실에 대비하도록 거시적 시각에서 건전성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

금리 정상화도 코로나 때문에 부담되긴 하지만 피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테이퍼링과 금리인상이 시작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다가 나중에 무방비로 더 큰 충격을 떠안는 사태가 벌어져선 안 된다.

금융기관들도 대출이 투기적으로 쓰이는지를 심사하고 감시하는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담을 떠안거나 배제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애초에 다른 나라들이 재정으로 부담했던 부분에 대해 각자 빚내서 버티라고 했었던 만큼 정책자금도 충분히 공급해서 필요한 곳엔 돈이 잘 흐르게 해야 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 [아침햇발] 1.

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 [아침햇발]

혐오에 꺾이는 학생인권조례 2.

혐오에 꺾이는 학생인권조례

[크리틱] 마르틴손 사건 / 김영준 3.

[크리틱] 마르틴손 사건 / 김영준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4.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사설] ‘채 상병 특검’ 국회 통과,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말아야 5.

[사설] ‘채 상병 특검’ 국회 통과,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말아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