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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렇게 서로 무릎이 된다

등록 2021-10-10 17:17수정 2021-10-11 02:32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허공에 순간이 꽂힌다 / 순간은 곧 곧게 뻗은 여의봉마냥 / 길어지고 길어져 / 뇌리 맨 끝자락에 홀씨 하나 심는다… ”

“이모, 이것도 시가 되나요?” 열일곱살 찬이가 시인인 애라에게 즉석에서 지은 시를 건네며 물었다. 애라가 낭송을 시작하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탄성이 터졌다. “개구쟁이로만 알았던 찬이가 문학 소년이 됐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중년여성 넷이 ‘번개’로 모인 자리에 진주와 두 아이 찬이, 현이가 합세했다. 수다꽃이 활짝 폈다.

진주네는 맞벌이하며 삼남매를 키운다.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자라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즐겁다. 맏이 찬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7년 전 처음 봤을 때는 호기심 많은 ‘초딩 ’이었다. 봄이면 텃밭농사 짓고, 바자회에 자기가 안 쓰는 물건을 들고나와 제법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찬이 아빠는 틈날 때마다 “대학 안 가도 돼. 고등학교 졸업하면 농사짓든 장사하든 자기 밥벌이 해야지 ”라고 말하곤 했다. 귀농을 진지하게 추진하던 가족이라 그저 농담같이 들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청년농부 찬이도 꽤나 멋질 것 같다.

동생들과 여한 없이 뛰놀던 초등 5학년 찬이는 동네 도서관 공연에 직접 만든 노래를 들고 나갔다. 곡목은 ‘놀고 싶다!’ 자고로 놀다 보면 더 잘 놀고 싶어지는 법, 중학생이 되자 기타도 치고 시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쓴 시가 500편 정도 된대요. 얼마 전엔 저녁노을을 찍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는데 꽤 근사하지 뭐예요.” 좀처럼 자식 자랑을 하지 않는 진주의 미소가 반짝였다. 이날 이야기를 전했더니 기타 치고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남편은 찬이하고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다며 신이 났다.

둘째 현이는 올해 중 1, 꿈 많은 소녀다. 요즘은 친구들과 주제토론 하는 재미에 빠졌단다. 최근에는 “회사에서 직원이 일을 못할 때 해고해야 하는지”를 두고 토론했단다. 현이 생각을 물었다. “직원이 일을 못하면 손해를 보잖아요. 다른 직원들한테 피해도 가고요. 해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듣고 있던 애라가 시인의 감성으로 물었다. “직원은 회사에서 해고되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나도 끼어들었다. “만약에 실업수당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면 서로 덜 힘들지 않을까? 사회안전망이 튼튼하면 사장님도, 노동자도 실패가 그렇게 두렵진 않을 것 같아.” 다음날 진주가 문자를 보내왔다. “현이가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심 봉사 눈 뜨듯 번쩍했대요.” 너무 가르치려 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됐는데, 괜스레 으쓱해졌다.

현이는 타로점도 잘 본다. 매주 목요일이면 학교를 마치고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서 타로점을 봐준다. 어른 손님이 대부분이다. 나도 며칠 전 현이의 고객이 됐다. 인생 전환기에 여러 선택지를 놓고 심란한 시절이다. 재미라지만 점괘가 궁금했다. 현이가 점괘를 풀었다. “이모는 이룬 게 많아서 미련과 고민이 많은 거예요. 그래도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풀면 잘될 거예요. 곧 즐겁고 평화로운 휴식이 찾아와요. 이모가 어떤 선택을 해도 소소하고 여유롭게 잘 살아요.” 근심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안 좋은 카드들도 많은데 이모는 하나같이 참 좋네요.” 미소도 지어준다. 이룬 게 많아서 미련이 많다는 말에는 내심 깜짝했다. 다음날 만난 현이 아빠에게 놀랐다고 말하니, 점괘가 안 좋게 나오면 핑계를 만들어서 다시 뽑으라고 한단다. 현자 같은 현이다. 그 지혜가 고맙다. 가르치기는커녕 이렇게 배운다.

진주네는 집을 지으며 1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개방 공간으로 만들었다. 자연히 동네의 아지트가 됐다. 코로나 전에는 1층에서 어른들이 노래 부르면 아이들이 내려와 같이 부르곤 했다.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라며 다그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방임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함께 농사지으며 일하게 하고, 아이들 앞이라고 굳이 빚 걱정을 감추지도 않는다. 자유와 책임감을 같이 가르친다.

부모의 태도 덕분일까, 이웃들도 아이들과 거리낌이 없다. 정말 친구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심리기획자로 잘 알려진 이명수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중목욕탕에서 욕조에 앉아 있는데, 서너살 먹은 아이가 아빠랑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모르는 사람인 저의 무릎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짚고 일어나는 거예요…. 그 순간 짜르르 느낌이 왔어요. 아가야, 세상이 너한테 내 무릎 같았으면 좋겠구나.” 나와 어른들이 이 아이들의 무릎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알고 보니 이 아이들도 우리의 무릎이었다. 이렇게 서로 무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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