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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 비극적 싸움을 말리려면

등록 2021-10-13 19:25수정 2021-10-13 22:37

[편집국에서] 전종휘|사회에디터

살아온 50년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이 갖는 엄중함이 무겁다. 바다로 나간 강물을 다시 강으로 불러들일 순 없는 일이다.

가장 부끄러운 대목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육아휴직을 한번도 쓰지 않았단 사실이다. 삶의 마침표를 앞둔 이들이 공통으로 후회하는 게 “주변 사람한테 사랑한단 말을 더 많이 할걸”, “아이 어릴 적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걸”이라는 데 말이다. 게다가 회사 일 핑계로 매일 늦은 귀가는 누군가의 ‘독박 육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청구서는 반드시 돌아온다.

내게도 기회는 있었다. 꼭 20년 전이다. 큰아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2001년 11월 이른바 모성보호제도가 시행됐다. 무급이던 육아휴직이 유급이 됐고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쓸 수 있게 됐다. 당시 60일이던 산전후휴가도 90일로 늘리고 이 중 30일은 유급으로 바뀌었다.

무심했던 부성에 굳이 핑계를 대자면 20년 전 육아휴직 급여 수준은 지금보다도 형편없었다. 급여 수준을 떠나 한달에 20만원을 줬다. 이후 2002년 30만원, 2004년 40만원, 2007년엔 50만원으로 계속 늘었으나, 여성 임금이 남성의 60% 수준에 그치는 차별적 노동시장 탓에다 홑벌이와 맞벌이를 오가는 가정에서 딱히 육아휴직을 할 경제적 유인이 되진 않았다.

이후 출생률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고 일터 중심 가치관에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 중요해지면서 육아휴직 기간과 급여 수준은 계속 늘었다. 지금은 육아휴직 1년 가운데 첫 석달 동안엔 통상임금의 80%(150만원 한도), 나머지 기간엔 통상임금의 50%(120만원 한도)까지 준다. ‘아빠 육아휴직 보너스제’ 등 이름으로 남성의 육아휴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덕에 지난해 육아휴직을 쓴 아빠는 2019년에 비해 23% 늘어난 2만7423명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 세명이 육아휴직을 할 때, 아빠는 한명꼴에 그친다. 2019년 기준 8살 이하 자녀를 둔 상용직 부모 중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8.4%에 그친다는 통계도 있는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육아휴직을 이유로 각종 불이익을 주거나 대체 인력을 구해주지 않아 남은 동료 눈치 보느라 휴직할 수 없는 직장 문화 개선이 필요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법률상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나 특수고용노동자 등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육아휴직을 제대로 쓰게 하기 위해 임금이 아닌 소득 중심으로 고용보험체제를 개편하는 방안도 제시된 지 오래다. 동시에 육아휴직의 소득대체율을 더 높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문제는 현행 체제에서 육아휴직 급여 지출을 대부분 고용보험 재정의 실업급여 계정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회에 계류 중인 내년치 예산안을 보면, 육아휴직 급여 등 모성보호급여로 1조9333억원을 쓸 계획인데, 이 가운데 정부가 세금으로 메우는 일반회계 부담분은 3000억원으로, 15.5%에 불과하다. 그나마 올해 13.8%에서 1.7%포인트 오른 수준이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고용 유지 차원에서 반씩 나눠 내는 주머니에서 모성보호 전체 급여의 84.5%를 부담하는 것이다. 이는 애초 입법권자들의 의지가 아니다. 2001년 6월 모성보호제도 도입을 위한 논의 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급한 대로 고용보험에 손을 벌리되 이른 시일 안에 정부가 일반회계와 국민건강보험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환노위는 제안 이유에서 “조속한 장래에 모성보호 비용의 100% 사회 부담화가 실현돼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록 모성보호는 여전히 실업급여 눈칫밥이나 먹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실업급여 액수와 기간이 느는 등 실업자 보호가 확대되고, 코로나19까지 덮친 지난해 고용보험기금 재정 적자는 5조3000억원에 이르렀다. 올해도 큰 적자가 예상되자 보수 세력은 정부가 ‘실업급여 퍼주기’를 한다는 무리한 주장까지 내놓는 판이다. 정부가 일반회계 대폭 인상을 미루는 사이 실업자와 육아휴직 대상 아동이 재원을 놓고 싸우는 꼴이 됐다. 이번 정기국회가 예산 조정 과정에서 이 비극적 싸움을 말려주길 기대해본다. 합계출산율 0.84명으로 전세계 꼴찌인 나라에서 못 할 일이 무엇인가.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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