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길은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서 등불까지 되어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염치없다. 어린 청춘들이 발 헛디뎌 부딪히고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 길목 길목에 등불을 켜놓을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
[시민편집인의 눈] 김민정|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의 저자 허태준의 말이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우리 사회에 없다고 했다. ‘대학생’이나 ‘직장인’처럼 한 단어로 말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삶의 서사가 그에겐 없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의 이야기를 사회에서 찾아보려 했지만 그가 접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만화 속 이십대는 다 대학생이었고 직장인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구석 자리로 밀려나 잊힌 존재들의 이야기는 사망 사고 뉴스를 통해서만 전해졌다.
지난 6일 전남 여수에서 홍정운군이 바다에 빠져 숨졌다. 해양레저 전문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요트업체로 현장실습을 나간 지 열흘 만에 벌어진 일이다. 실습계획서에는 하루 7시간, 배 위에서 항해 보조를 하거나 탑승한 관광객 안내를 배운다고 적혀 있었다. 막상 선착장에서는 하루 12시간 선주가 시키는 일을 해야 했고, 바닷물에 들어가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따야 했다. 기본적인 잠수장비도 주지 않다가 정운군이 호흡곤란을 호소하자 몸에도 맞지 않는 12킬로그램 장비를 주고 수심 7미터 물속으로 내려가게 했다.
잠수 업무는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2인 1조로 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유해·위험작업의 취업 제한에 관한 규칙 등에 그렇게 돼 있다. 애당초 사업주는 18살 미만인 사람에게 잠수 업무를 시켜선 안 된다. 근로기준법이 그렇게 정했다. 근로기준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이 ‘사용금지 기업’ 규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되도록 대통령령으로 정했다. 업체는 깡그리 무시했다. 잠수기능사 자격증은커녕 물을 무서워하고 수영도 잘하지 못했던 열일곱살은 그 위험한 작업을 혼자서 하도록 내몰렸다. 정운군 추모제에 참석한 한 학생은 “위험한 거 알면서 왜 혼자 잠수하게 했냐”며 울먹였다.
학교는 어떤가? 학교 쪽은 사전 실사를 통해 현장실습 업체가 잠수 업무를 하는 사용금지 기업은 아닌지, 안전 및 보건 관리 수준은 적절한지 등을 판단하게 되어 있었다. 홍군의 학교 관계자는 이 업체가 ‘적절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정작 실습생의 현장 적응 및 휴식 시간, 수당 등을 적어야 할 협약서 조항은 빈칸으로 남긴 채 학교장 도장을 찍었다. 교육부는 현장실습생의 안전을 강화한다며 ‘기업현장교사’ 제도를 2년 전 도입했다. 정운군의 기업현장교사는 업체 대표였고, 이날 정운군 옆에 없었다. 홀로 물에 빠진 정운군을 구조한 이는 타업체 민간잠수사였다.
요식행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일정한 방식을 요구하는 법률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일정한 방식을 요구하는’ 규정이 있는데도 몸에 맞지도 않는 잠수복을 입혀 정운군을 바닷물 속으로 밀어넣은 선주의 강심장에, 제자들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금지기업 규정을 건성으로 체크하고 협약서의 중요 조항은 표시도 하지 않은 채 학교장 도장을 꽝꽝 찍어댄 학교 관계자들의 무신경에 가슴이 서늘하다. 아예 법과 규정이 없었다면, 이를 적용하고 확인하는 절차가 없었다면 이렇게 허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나하나 만들고 지키면 되니까 말이다. 활자로만 존재한 규정, 영혼 없이 오간 서류 뒤에서 납덩이를 몸에 매단 아이가 7미터 깊이의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운군을 사망에 이르게 한 요트업체는 사고 나흘 만에 손님을 태우고 운항을 재개했다. 때로는 무지보다 무감각, 무신경이 더 큰 비극을 부른다.
허태준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던 날들을 “수많은 가능성이 주변을 가득 채우던 날”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시절을 겪는다. 정운군의 수많은 가능성은 허깨비 같은 어른들의 그 요식행위 속에 그날 바닷속으로 수장되어버렸다. 정운군의 아버지는 “두번 다시 이런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운이의 죽음이 촛불이 되어 다른 친구들의 등불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길은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서 등불까지 되어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염치없다. 어린 청춘들이 발 헛디뎌 부딪히고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 사회 길목 길목에 등불을 켜놓을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