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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우리 집에 자전거가 석대인 이유

등록 2021-10-31 18:05수정 2021-11-01 02:32

서울 인사동 나들이에서 만난 그림 <게으른 오후>. 이걸로 ‘바라만 보는’ 우리 집 자전거는 석 대가 되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폴리나 유(PAULINA YOO) 작가의 작품.
서울 인사동 나들이에서 만난 그림 <게으른 오후>. 이걸로 ‘바라만 보는’ 우리 집 자전거는 석 대가 되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폴리나 유(PAULINA YOO) 작가의 작품.

양희은ㅣ가수

가을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서울 올림픽공원에 꽃구경 간 친구 사진을 보고, 우리도 만나서 산책하자고 부추겨 오랜만에 중학교 2학년 5반 친구들과 뭉쳤다. 공원 동문으로 들어가 왼쪽 주차장에 차 세우고 길 건너 국숫집에서 점심 먹고 걷자는 계획인데 국숫집은 그야말로 아줌마들로 가득했다.

“야! 별천지네, 여기.” 메뉴를 보다가 똑같이 시래기 손칼국수를 시켰다. 누구라도 다른 걸 시키거나 아님 각자 다른 걸 시켜서 한 젓가락씩 맛봐도 좋았으련만. 여튼 뜨끈한 국물이 당기는 날씨다.

어느새 바람결도 바뀌고, 그 동네 사는 친구의 안내로 핑크뮬리와 댑싸리가 가득 핀 곳으로 가니 우리보다 좀 더 윗분들이 사진을 번갈아 찍고 계셨다. 핑크뮬리와 댑싸리는 멀리서 보면 분홍 안개, 분홍 꿈결 같다. 거기서 출발해 장미농원과 코스모스, 황화코스모스 언덕까지 모두 보는 중에 비 뿌리던 하늘도 마침 알맞게 개어 ‘날씨가 한몫했네. 날 잘 잡았다’며 좋아했다. 감나무에도 모과나무에도 빽빽하니 열매 달린 걸 보며 감탄하고 올려다보는데 새소리가 낯설고 다양해 신기했다. 그곳에는 개 데리고 온 이들도 많은데, 골든리트리버 모임인지 사람들은 이야기 나누고 개들은 짖었다. 개소리, 새소리가 들리니 생동감이 넘쳐났다. 포동포동하니 살찐 길냥이들도 보이는데 깔끔해 보였다.

“세상에, 여기 이런 곳이었네. 23년 전 자전거 배우러 ‘송파어머니 자전거교실’(바로 이 공원)에 왔었고 수료증 딴 후에 처음이다.”

그러는 나를 친구가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얘는? 너 여기서 콘서트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니?”

“어머, 그랬니? 공연이라고는 한번도 한 적 없는 듯 까마득하네. 기억에 남아 있질 않아. 이상한 기분! 맞다, 맞아. 우리는 언제나 대기실과 무대 뒤, 그리고 무대만 아니까. 공연 오후 8시, 스탠바이 1시라도 일찍 도착해 산책한다는 건 생각도 못하지. 무대 밖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무서운 세상인 듯 꼼짝 안하고 분장실에서 대기하니까. 밖으로 나가면 공연 내용도 날아갈 것 같아서….”

파일럿인 친구는 세상 오만 군데 다니며 구경도 하고 남다른 월급도 받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내가 아는 건 공항뿐! 세상의 많은 공항을 다닐 뿐이에요” 대답했단다. 내게도 “휘이휘이 다녀, 노래해, 돈도 벌어, 얼마나 좋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장거리 이동이야 늘 하지요. 하지만 창밖으로 스치는 낯선 도시의 풍경이 다예요. 극장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나면? 누구 망하게 할 일이 있나요?” 밖으로 나다니는 건 금기다. 누구라도 공연이 업인 사람들은 그렇다. 간혹 긴 시간 참았던 담배를 태우러 극장 뒤편으로 나오는 이들이 있긴 해도 길 건너 밥집도 가기 쉽지 않아 도시락 배달을 받는다. 그래서 결론: 극장 안팎의 풍경만 구석구석 두루 안다고 보시면 된다.

누구에게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겠다. 어떤 이에겐 수영, 또는 운전, 영어, 수학, 큰 시험 보는 날의 두려움, 그 벽을 넘어서면 세상 부러울 것, 두려울 것도 없어질 것 같은 무언가 말이다. 내게는 그게 바로 자전거 타기이다. 첫날 다치지 않고 사람과 자전거 모두 안전하게 넘어지기부터 배웠고, 일주일의 수업 후 올림픽공원 바깥쪽 벽을 끼고 돌아와 수료증도 땄지만 여전히 자전거를 못 탄다. 하지만 인생철학은 한 수 배웠다.

① 쓸데없이 목과 어깨에 힘주지 말 것. 힘을 뺄 것.

② 자기 발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시선을 저 멀리 앞에 둘 것.

얼마나 철학적이냐? 다 좋다, 그런데 왜 내 자전거는 내가 원치 않는 화단이나 큰 나무를 향해 가느냔 말이다. 운명의 바람도 내가 원한 바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왔다(가수가 꿈이 아니었으니까). 아직도 내겐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까봐 두려워서 바라만 보는 자전거가 두 대나 있다.

오랜만에 남편과 인사동 나들이 겸 친지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둘러보다가 <게으른 오후>라는, 느긋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흰 벽에 부딪혀 눈이 부실 정도인 한낮의 시골집 마당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작품이 마음에 들어왔다. 바닥의 돌길, 옛집, 낡은 초록색과 파란색의 문, 바랜 창틀 등이 사진처럼 남겨져 있는…. 색연필을 일일이 뾰족하게 깎아서 그린 색연필화에 담긴 시간들. 가슴에 얹힌 것이 그림 속 햇살을 받아 녹아내리는 듯했다. 보고만 있어도 마술처럼 자전거를 타게 될 것 같았다. 난 그 그림을 사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 집엔 바라만 보는 자전거가 석 대나 되었다. 에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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