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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날씨가 덧칠한 파랑

등록 2021-11-07 16:10수정 2021-11-08 02:33

이우진ㅣ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어둠 속에서 파란빛이 먼저 다가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높은 곳에 떠 있는 기체가 일찍 해를 보고 소식을 전한 것이다. 스카이라인에는 두터운 대기층을 지나며 살아남은 붉은빛과 주변의 파란빛이 섞여 오묘한 보랏빛이 되어 시야에 들어온다. 여명이 아름다운 것은 땅이 떠오르는 태양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의 파랑은 그냥 파랑이 아니다. 빛나는 파랑이다. 햇빛의 빠른 박자에 맞추어 기체 안의 전자가 진동하며 경쾌하게 춤을 춘다. 게다가 바람이 부는 대로 대기가 흔들거리면 푸른빛이 굴절하며 반짝거린다. 사파이어 보석이 우주의 별처럼 하늘에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 기체들은 층층이 쌓여 중력이 끝나는 곳까지 올라가 빛을 산란하므로 파란색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면 볼수록 심원한 대기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이 파랑은 매일 마주치는데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파랑은 없다. 어딜 보나 언제 보나 매번 다른 파랑이다. 머리 위를 쳐다보면 청화백자의 무늬처럼 진한 파랑이지만, 지평선을 바라보면 닳고 닳은 청바지처럼 엷은 파랑이 된다. 같은 곳을 쳐다보더라도 태양의 궤적에 따라 색이 변한다. 태양이 시야에 들어오면 환한 빛이 들었다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다시 푸른빛이 돌아온다. 수증기나 먼지가 줄어드는 날이면 푸른빛이 더욱 맑아진다. 어디 그뿐인가. 오가는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파랑은 흰색이나 회색에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지기도 한다.

파란 하늘에 다가설 수 없는 것처럼 땅 위에서도 파란색을 채취하기 쉽지 않았다. 암석이나 식물, 곤충에서 드물게 추출한 재료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파란 색소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에서 얻은 마리안블루는 진귀한 보석처럼 취급했고, 고귀함을 상징하는 곳에 주로 칠했다. 오죽 비쌌으면 조선은 한때 코발트를 칠한 도기를 못 만들게 했을까.

생활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푸른색은 대개 화학적 공법으로 만들어낸 인공 색이다. 휴양지로 유명한 그리스 산토리니섬은 하얀 벽돌 위에 얹은 돔 모양의 파란 지붕으로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섬마을 사람들은 석회암에 탈크 파우더를 섞어 만든 안료를 썼다. 배를 손질하고 남은 페인트로 지붕뿐 아니라 집 안 다른 곳을 칠할 만큼 파란색도 흔한 색이 된 것이다. 쓸 수 있는 파란색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나 되지만, 하늘이 보여주는 색의 다양성과 깊이와 광택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가을에는 높은 구름이 많이 낀다. 북쪽으로 올라갔던 찬 공기가 다시 되돌아오는 시기다. 찬 공기가 남쪽으로 많이 내려올수록 그만큼 따뜻한 공기는 높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구름의 고도가 높아진다. 고도가 상승할수록 수증기는 적어져 구름층도 엷어지고, 구름에서 반사한 흰색이 고스란히 우리 눈에 들어온다. 구름이 높이 뜨면 하늘이 높아 시원스레 보이고, 순결한 흰색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신선함을 더해준다. 게다가 찬 공기로 인해 대기 상부에서는 얼음 입자가 구름방울이 된다. 중력을 못 이겨 낙하하는 얼음 입자가 증발하며 만들어내는 새털 모양의 구름 띠는 차분한 파랑 위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 가을치고는 때 이르게 한파주의보가 내리던 날 북쪽에서 찬 공기가 빠르게 내려와, 구름을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렸다. 추분을 지나며 태양의 남중 고도는 한결 낮아진 만큼, 높은 구름에 비친 저녁 햇살은 더 큰 각도로 구름 하부에서 반사하며 멋진 저녁놀을 선사했다. 다음날이 되자 찬 공기가 불러온 대륙 고기압이 세력을 뻗치면서,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고 먼지마저 사라졌다. 대기는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어가는 벚나무 이파리 사이로 더욱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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