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가 줄어들면서 애초 습지에 서식하던 수원청개구리(왼쪽)는 청개구리와 잡종을 형성해 정체성을 잃고 있다. 그러나 노랑배청개구리(오른쪽)는 잡종화 위험은 덜하지만 서식지 파괴에 직면해 있다. 장이권(왼쪽), 아마엘 볼체 외 (2020) ‘플로스원’ 제공.
김산하ㅣ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이름은 단지 이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의 표지로서 소통을 위한 장치이자 동시에 그 대상의 정체성에 기여하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언어가 하나의 이름이다. 돌, 바람, 산, 하늘. 따지고 보면 그 특정 단어가 꼭 그 특정 대상의 레이블이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어느새 우리는 그 이름과 대상을 거의 동일시한 채로 인식한다.
본 칼럼의 이름 역시 그냥 이름뿐인 것은 아니다. 자연과 생태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지표종인 양서류로서, 그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작금의 문명에 대한 저항정신의 상징으로서 청개구리라 작명한 것이다. 물론 뭔가를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의미로서만 청개구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물리적인 동물 자체 또한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두고 있다. 특히 최근에 그 이름이 세간에 오른 어떤 청개구리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다름 아닌 노랑배청개구리. 아직 이 이름이 생소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16년 시민과학자들에 의해서 처음 발견된 이 동물은 2020년에 신종으로 정식 등재된, 한마디로 아직 ‘따끈따끈한’ 종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중요성은 과학에서도 매우 두드러진다. 학계에서 새로운 종으로 공식 인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름도 주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한때는 딱 1종을 의미하던 ‘청개구리’라는 단어는 이제 어느새 그냥 청개구리, 수원청개구리, 그리고 가장 최근의 노랑배청개구리까지 3개의 종을 뜻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신종의 발견은 보통 반가운 소식이나, 별로 반갑지 않은 또다른 소식이 동반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이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발견되자마자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사례가 많다는 뜻이다. 즉, 지금껏 몰랐던 종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라면, 그만큼 그 수가 이미 적거나 막 줄어들고 있는 경우일 공산이 큰 것이다. 노랑배청개구리도 바로 이런 전형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 익산에서 최대 개체군이 발견되었지만 몇백마리 정도에 불과하며 전체 개체수가 1천마리 미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막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들의 핵심 서식지가 파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전체 개체군의 86%가 익산 평야지대에 서식하고 있는데 바로 이곳에 익산국토관리청이 왕복 4차선 국도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핵심 서식지역을 우회하는 원안을 고쳐 굳이 서식지를 관통하는 개정안을 고수함으로써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서식지 파편화와 로드킬 등 도로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대표적인 생물이 개구리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형국인지 여실히 다가온다.
도로건설 논란 자체보다 더 황당한 것은 이 사태에서 대안이랍시고 또다시 등장하고 있는 ‘이주’ 논의이다. 개발사업에 의해 위협에 직면한 생물이 있을 때마다 단골손님으로 내미는 이 ‘이주 카드’는 마치 이 세상 어딘가에 언제든지 입주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공실’ 서식지가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다. 즉, 생물이 살기에 너무나 적당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안 살고 있는 ‘미분양’ 상태의 자연 공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도 무시하면서도 마치 해결책처럼 나타나는 이 해괴한 논리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동물을 이주시키기 위해 거의 전부를 포획하는 것이 가능이나 한 것처럼, 그 과정이 사람의 이사처럼 순조로울 것처럼 대충 넘어가는 기만과 거짓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태이다. 멸종 위기의 생물을 살리는 방법은 그들과 그들의 집을 해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