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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소박해도 집밥이 최고

등록 2021-11-28 19:21수정 2021-11-29 02:31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사실 말이지 생방송과 공연 등을 겸하면서 부엌을 지킨다는 게 정말 어렵다. 결혼 전 시어머니를 뵈었을 때 “아이구~ 선머슴아가 우리 막내아들 밥이나 제대로 챙겨주겠나?” 이런 눈길이셨다. “밥이나 제대로 할까, 싶으신가 봐요” 했더니만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네” 하셨다. 결혼 전 시댁에서 과일을 깎을 때 내 손을 찬찬히 지켜보셨다. 껍질 아닌 과육을 다 깎게 생겼나 보다. 인정한다, 누가 봐도 조신하고 엽렵히, 살림 잘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걸.

그래도 바다 건너가 살 때 그 끼니만큼은 꼬박 챙겼다. 뉴욕 제이에프케이(JFK)공항을 거쳐 신혼집에 도착해 처음 차린 상은 가져간 명란젓과 구운 김으로 차렸다. 두부, 파, 마늘이 없어 아쉬웠지만 불고깃감이 냉장고 안에 있어서 그걸 물에 헹구고 꽉 짜서 간을 빼고 끓였는데 썩 괜찮았다. 마침 김치 큰 병이 있어 갓 지은 밥과 맛나게 먹었다. 35년 전 이야기다.

나는 살림엔 완전 맹탕인데다가 해본 게 없어 도무지 무엇을 어찌할지 몰랐다. 대신 진즉에 시집가 살림을 맵게 사는 숙달된 조교들로부터 전화 과외로 만들어둔 노트가 있었다. 밑천은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제시(중국계 미국인)에게 요리 배울 때 정리한 노트도 있었다. 입말음식(글이나 책이 아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통음식)을 받아 적고 재료와 다듬기, 조리 순서를 잘 정리한 게 도움이 컸다. 무엇이든 직접 해야 자기 것이 된다. 매일 조금씩 기본 밑반찬에 국, 찌개, 생선구이를 보태고 생선가게며 값이 제법 나가는 한인 슈퍼마켓을 둘러보며 신경을 썼다. 당시 남편의 고혈압으로 의료보험 드는 데 문제가 있어 식단의 소금기를 확 줄여서 심심하게 조리했는데, 한달 후 병원 가서 검사하니 어느새 혈압은 정상이 되었다.

이렇듯 음식의 중요성은 암 환자인 나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수술 후 석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딸을 살리려 엄마는 온갖 식이요법에 관한 일본 책을 구해 공부를 많이 하셨다. 무염식에 유기농 채소, 온갖 잡곡을 섞은 거칠고 시꺼먼 밥을 열심히 해 먹이셨다. 무염식은 나름 정리된 이론이 있겠으나 도무지 맥이 떨어지고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 앉았다 일어나도 별이 번쩍이고 어지러워 휘둘렸다. 엄마는 종로구 옥인동에서 멀리 삼육대학까지 가서 유기농 채소를 구하고 신문지로 곱게 싸서 그늘진 구석에 보관하셨다. 당시 냉장고라야 어깨 정도 높이가 고작이어서 보관도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장에 간 사이 나는 오이지, 콩자반, 멸치볶음을 꺼내 물 만 밥에 우걱우걱 먹었더니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면서 기운이 살아났다. “엄마, 나 수술 잘됐다며? 나쁜 걸 죄다 떼어냈는데 이제 환자가 아니잖아?” 한참 생각 후에 엄마는 “그래, 반찬은 심심하게 남들처럼 먹어도 밥만은 잡곡밥으로 하자” 하셨다. 그렇게 보통 반찬으로 바꾸면서 속 기운이 차올랐다.

석달 시한부 인생인 내게도 시간은 잘도 흘러가 석달을 넘기자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아직 살아 있네. 와서 일하자!” 외국서 정말 귀하게 사 모은 엘피(LP)판을 들고 출근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한 아이처럼…. 차츰 발걸음에도 힘이 붙기 시작했다. 결혼 초기에 남편은 급체한 것처럼 몇번 쓰러졌다. 세상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는 남의 나라 땅, 맨해튼 한복판에서 큰 바늘 끝을 벌겋게 가스불에 달구어 벌벌 떨며 외할머니 방법대로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땄더니 금세 맥이 돌아왔다. 많은 검사를 했어도 밀가루 알레르기 같다는 시원찮은 결론이고, 나는 암 수술 후 엄마가 나를 돌보셨던 것처럼 식단에 더욱 신경을 썼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엌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지방 공연 후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 생방송을 하고 장 봐서 반찬을 만들고 시어머니 계실 땐 주말이면 반찬 만들어 꼭 찾아가 뵈었다. 하지만 부뚜막에 불이 꺼진 집은 아무래도 삭막할 것 같다. 요즘처럼 맥 풀리고 기운 없어 처진 상황에선 집콕을 좋아하는 나는 외려 식단에 더 신경을 쓰는데 92살 노모와 73살 남편의 건강이 밥상에 달렸기 때문이다. 소박해도 집밥, 고단해도 집밥!!! 집밥 차려먹고 기운 얻어 세상으로 나가 자기 몫을 한다는 믿음이 있다. 지난 휴일엔 엄마와 단둘이 팽이, 새송이, 만가닥, 표고버섯에 알배기배추, 두부, 쇠고기 쪼끔 넣고 버섯전골을 해 먹었다. 심심하게 끓여 땀 흘리며 잘 먹었다. 엄마는 점점 더 맛난 것에 집중하신다. 잡숫는 일이 낙이다. 뭔가를 맛나게 잡순 후 기분이 업되며 아주 좋아라 하신다. 엊저녁엔 대패삼겹살에 숙주, 부추 넣고 볶음우동을 했다. 역시 맛나게 드셨다. 나이 들수록 밥심, 뱃심이란 말, 내게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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