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폐막일인 지난 달 13일(현지시각) 영국 글래스고의 대성당에서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실패했다는 의미로 모의 장례식 행위극을 선보이고 있다. 글래스고/AFP 연합뉴스
김산하 |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적응의 능력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는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반응하게 해주므로 생존에 유리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원래 어땠는지를 쉬이 망각하게 해주므로 사물에 대한 기준이 약화된다. 적응력이 뛰어나면 상황이 안 좋아져도 어떻게든 살아남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느새 내 모습을 잃은 채 그저 사는 데 급급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에 갇힌 동물이나 옥살이를 하는 죄수에서도 이를 관찰할 수 있다. 원래 누리던 자유와 환경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곳에서 오랜 기간 지내다 보면 적응력이 발동한다. 초창기의 답답함은 점점 익숙함으로 대체되고 그곳의 작동원리에 나의 생리가 맞춰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과거의 나는 없다. 오히려 적응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수십년 옥살이 끝에 가석방되었지만 생활이 벅차 결국 자살을 선택한 노인 브룩스처럼 말이다.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과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 비록 세태가 못마땅하더라도 모든 걸 등지거나 거스르겠다는 고집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변화의 와중에도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를 아예 잊는다면 그 적응은 아니 하느니만 못하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삶은 단순 생존으로 전락하고 그만큼 회복과 발전의 희망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긴 기다림 끝에 일상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는 시점에서 들이닥친 또 한 번의 변이 바이러스 탓에 우리는 또다시 강화된 거리두기 등 새로운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쯤 되면 과거의 삶은 어땠는지 이제 거의 가물가물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일수록 적응의 함정에 주의해야 한다. 더 살기 힘들어진 세상을 살아갈 궁리만 할 게 아니라 그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선회하도록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가 병행되지 않으면 결국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세계 언론이 오미크론 소식을 보도하기 열흘 전, 영국 글래스고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폐막되었다. 기후변화 얘기가 강 건너 불구경인 사람에겐 아마 뉴스거리도 아니리라. 하지만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기후변화라는 최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촌이 또 한 차례 모인 중차대한 자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것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이고, 두려운 일인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결과는 예상대로 실망스러웠다. 당장 퇴출해도 모자라는 석탄발전은 ‘중단’하는 대신 ‘감축’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아직도 턱없이 모자라는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내년에 재점검하도록 하여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 셈이 되었다. 산림벌채를 2030년까지 전면 중단하기로 한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2014년 뉴욕 산림선언에서도 비슷한 약속을 하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서 그 효과는 미지수이다. 국내에서도 올해 산림청이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오히려 숲을 벌채하고 파괴한 것만 봐도 그렇다.
성에 안 차는 결과지만, 그것이 벌어졌다는 것과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기억하고,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정부와 언론과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는지 몰라도, 전 지구적 위기로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는데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 엄청난 사건에 너무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손에 안 잡히고 나와 멀게 느껴져도,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자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우리 모두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음을 똑똑히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