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글자를 배경으로 촬영된 주사기 바늘들. 로이터 연합뉴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하고 있다. 오미크론은 돌연변이가 30개가 넘으며, 지금까지 나온 어떤 변이보다도 빠르게 퍼진다. 현재의 백신이 효과가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내가 실망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여행 제한과 같은 방어적인 조치가 이 새로운 유령에 대한 유일한 조치 또는 가장 강력한 조치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동안 아프리카 국가들이 감염병을 통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 않았고 백신 불평등을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은 결과가 지금 펼쳐지고 있는 것도 그렇다.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은 추문에 가까운 세가지 태만에 의해 가속화된 것이다. 첫째, 전세계의 백신 접종률 격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은 이들의 태만이다. 둘째, 백신 연구개발을 위해 엄청난 공적자금을 지원받고도 로열티를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국가의 치료약 복제를 무상으로 허용하지 않은 제약회사들의 태만이다. 셋째, 감염병 극복을 위한 협력 모색을 어렵게 하는 감염병 국가주의의 태만이다. 이렇게 우리는 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은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다. 우리가 제3세계에만 가두어두려 했던 그 재앙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야코비는 “우리는 진실을 거부함으로써 진실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지금 이와 반대로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실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녹색 행동이나 코로나 극복을 위한 전세계적 협력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척함으로써 진실을 거부하고 있다. 텅 빈 선언만 잔뜩 발표했을 뿐 정확한 책임은 아무것도 명시하지 않은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그 예다.
조지 오웰은 1937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썼다. “우리는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계급 차별이 정말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혁명적 의견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그 힘의 일부를 끌어온다. 계급 차별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이룰 수 없다. 계급 차별이 사라지게 하려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결국은 같은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오웰은 혁명적인 변화를 말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보다는 변화를 막고 있음을 지적했다. 마치 자본주의의 문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좌파 연구자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연구 분야인 문화 제국주의가 정말로 무너지지 않을까 조바심 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웰의 글에서 ‘계급 차별’을 ‘지구온난화와 코로나’로 바꾸어 읽어보라. 그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나는 코로나 초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킬빌2>의 ‘오지심장파열술’처럼 자본주의에 일격을 가해 자본주의를 파열시킬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코로나를 급진적인 변화를 고안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는 위기를 이용해 자기를 강화하는 힘을 품고 있다며 내 주장을 비웃었다. 나는 결국 내가 맞았다고 생각한다. 야니스 바루파키스나 조디 딘 같은 학자들이 현재 등장하고 있는 신질서를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업 중심의 신봉건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지난 수년간 자본주의는 크게 변했다. 이 새로운 기업 중심의 질서에 코로나는 힘을 더해주었고,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새로운 봉건 영주들은 우리의 소통 및 교환의 공적 공간을 점점 더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비관적인 결론은 우리는 더 큰 충격과 위기를 경험해야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전투는 신자유주의와 그 너머 사이의 전투가 아니다. 앞으로의 전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열이 만든 여파의 두 형태 사이의 싸움, 즉 ‘메타버스’와 같은 보호 풍선을 제공해 우리를 위기에서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기업 신봉건주의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발명해야 한다는 불편한 각성 사이의 싸움이 될 것이다.
번역 김박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