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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과학적 생산성과 창의성

등록 2021-12-15 17:49수정 2021-12-16 02:02

여담
20세기를 빛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만 25편의 논문을 썼다. 그중 양자역학의 기초가 된 광전효과 논문과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보인 E=mc2 논문 등 네 편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AP 연합뉴스
20세기를 빛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만 25편의 논문을 썼다. 그중 양자역학의 기초가 된 광전효과 논문과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보인 E=mc2 논문 등 네 편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AP 연합뉴스

김민형 |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자 중 하나이다. 그는 정수론과 기하학, 함수론, 역학, 천문학, 화성학, 항해술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기술 다방면으로 연구 업적을 남기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날렸다. 현대 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반이 되는 ‘최소 작용의 원리’가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이라 불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라그랑주는 오일러의 제자였다.) 그는 또 엄청나게 생산적인 학자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생 동안 약 900편의 책과 논문을 남겼는데 1726년부터 1800년까지 유럽에서 발행된 수학, 이론 물리학, 역학 논문 중 약 3분의 1을 오일러가 썼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이 논문들 중 현재 과학자들이 읽는 것은 당연히 거의 없다. 한편으로는 오일러의 영향이 과학 문화에 전반적으로 스며들어 있어서 원문을 직접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일러 논문의 대부분이 지금 학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지속성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령 바람 속 풍차의 운동, 방정식의 허수근에 대한 명상, 어떤 특정한 도박 게임에서 물주의 승산, 반사 망원경 제조법의 향상 등 어떻게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길이 기억될 만한 과학적 중요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논문이 대다수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점은 같은 토픽을 가지고 비슷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는 것이다. 가령 1780년에만 지금 시각으론 단순해 보이는 대수 방정식 문제를 가지고 10여편의 논문을 썼다. 아이디어를 개발하다가 생각이 약간씩 정리되고 명료해지면서 점차 이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여러 편의 논문으로 쓰게 됐을 것이다.

20세기의 제일 유명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사회-정치적인 에세이 다수와 책도 몇 권 썼지만 순수 과학적인 토픽으로 발행된 학술 논문만 300편 이상이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대 초부터 죽기 직전인 1955년까지 계속 논문을 썼으니까 평균적으로 1년에 여섯 편쯤 썼다는 이야기다. 1905년은 보통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였다고 알려져 있다. 양자역학의 기초가 된 광전효과 논문, 원자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액체 속 미세물질의 브라운운동 논문, 특수 상대성 이론을 개발하여 맥스웰 방정식에 적용한 논문, 그리고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을 보인 E=mc2 논문 등이 모두 그해에 발행됐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업적들이다. 1905년의 또 다른 기적은 그해에 아인슈타인 논문이 25편이나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나머지 논문들은 거의 다 열역학에 대한 것들이어서 유명한 네 논문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쉽지 않다. 이 논문들이 현재 거의 읽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학자들의 역량을 평가해야만 하는 상황들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학문적 생산성을 어느 정도 고려하게 된다. 가령 교수 임용 절차에서 지원자들을 비교할 때 지속적으로 논문을 쓴 기록이 없는 학자는 대체로 불리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평가의 정당성은 당연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질적인 평가보다 양적인 평가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불평 또한 많다. 물론 논문 편수에 대한 큰 의존은 부작용을 수반하고 맹목적인 생산성 추구는 많은 사람과 사회를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학자 커뮤니티의 전반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양과 질 사이의 갈등 또한 별 현실성이 없는 담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질이 뛰어난 논문을 쓰는 학자는 대체로 생산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학문의 발전 과정이 효율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결과가 하나 나오기까지 학자는 많은 습작을 창출하고 오류를 여러번 범하며 상당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쓴 21개의 잊힌 논문들과 네개의 걸작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다. 가령 열역학에서 알게 모르게 중요한 ‘좌표 변환’의 개념이 상대성 이론의 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직접적인 관계를 찾기 어려운 논문들도 간접적으로 엮여 있는 경우는 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창작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어서 어느 무명 학자의 작은 예비 정리가 유명 수학자의 중요한 이론 체계에 흡수되는 일은 허다하다. 한 사람, 혹은 다수의 천재라도 아이디어의 공동 생산이라는 뒷받침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의 양과 질은 대치하기보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 학문과 사회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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