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는 삶의 과정이 아니라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노화의 종말>을 쓴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유전자 치료(조작)을 통해 노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합뉴스
김은형 | 문화기획에디터
이번 칼럼을 쓰기 시작할 때 내 책상 앞에는 커피잔 대신 커다란 반투명 플라스틱병이 놓여 있었다. 50~60대 이상이라면 한번도 안 마신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마신 사람은 없다는 음료수, 장 정결제다. 다들 느낌 아실 테니 설명은 생략. 화장실 옆에 간이 책상을 두고 마감을 끝내보려던 나의 야심찬 계획도 엉망진창. 건강검진의 계절이 돌아왔다.
나이 들면서 건강검진은 귀찮은 일에서 두려운 일로 바뀌었다. 젊을 때는 빨간색 숫자와 ‘재검’ 도장이 아롱다롱 찍혀 있는 선배들의 검진결과표를 훔쳐보면서 ‘저렇게 사니 ㅉㅉ’ 하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거짓말처럼 내 일이 되었다. 왜죠? 난 여전히 일주일에 이틀 술 먹고, 운동 안 하고, 청춘처럼 살고 있는데!
검진을 마치고 이 글을 쓰는 현재 종합결론은 안 나왔지만 이미 실망스럽다. 키가 1㎝ 이상 줄었다. 몇년 전부터 꾸준히 조금씩 줄어왔지만 1㎝가 넘어가니 허리 굽은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게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비만진단표에서 지난해까지 ‘표준’ 쪽에 가까운 ‘이상’ 지역에 머물던 복부비만은 어찌나 박력 있게 끝을 향해 달려가던지 표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나의 뱃살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이 와중에 친구들이 종종 살 빠졌냐고 묻는 걸 보면 전형적인 노화의 지표, 이티(ET) 체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마치 미와 양으로 가득한 학기 말 성적표를 받듯 빨간 글씨와 ‘재검’ 도장이 찍힌 노화성적표를 받을 생각을 하니 더 심란해진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요새 희망전도사들이 부쩍 늘고 있다. 노화는 삶의 과정이 아니라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노화의 종말>을 쓴 데이비드 싱클레어가 대표적이다. 그 스스로 장수의 실험대가 되기 위해 동서양의 온갖 항노화제를 공수 때로 밀수해 섭취하며 유전자 연구를 해온 싱클레어는 현재 의학과 바이오산업의 초미의 관심사인 유전자 치료(조작)를 통해 노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래된 서랍이 헐거워지고 삐걱대듯이 우리 신체의 너덜너덜해진 유전자를 장수 유전자를 이용해 처리하면 신체도 두뇌도 다시 튼튼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머지않은 시일에 과학적인 성과를 토대로 인류의 평균 수명은 ‘113살’이 될 것이며 150살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보면서 ‘어디서 구라를’ 했는데 <의학의 미래>에 등장하는 실리콘밸리 바이오스타트업들의 야심(150 받고 50 더!)과 도전을 읽어보니 싱클레어는 매우 현실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이 근래 덤벼드는 분야 중 하나가 장수산업이라고 한다. ‘취미는 우주여행’을 실현시킨 베이조스나 저커버그도 장수프로젝트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구글까지 연구에 나섰다니 왠지 내 생전에 120살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쯤에서 누구나 드는 질문. 120살을 산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를 비롯해 80% 이상의 사람들이 손사래를 칠 것이다. 평균 수명이 80대인 지금도 평균 십년 가까이 병과 싸우다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데 휠체어에서 반세기를 더 살라고?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지금의 70대는 40대가 되고 90대는 60대의 삶을 살게 된다면? 아저씨, 잠깐, 잠깐! 보따리 싸는 실리콘밸리의 약장수들을 다시 잡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싱클레어조차 아들한테 “얼마나 더 지구를 파괴시키려고 하느냐”는 비난을 들었을 정도로 장수는 다른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도 국민연금이 바닥이라는데 상당수는 90대에 혈색 좋은 얼굴과 아직 든든한 근력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을 길게 이어갈 공산이 크다. 베이조스나 저커버그 부류나 100살 때 5년짜리 화성여행 패키지를 떠나는 정도의 ‘여유 있는’ 노년을 즐길 수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노화 억제의 핵심 소재 가운데 하나인 줄기세포 연구로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는 줄기세포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에 겸손하고 간결하게 답한 바 있다. “시간과 돈”이라고.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노벨상 수상자도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도 부정할 수 없는 항노화 방법에는 꾸준한 운동과 소식, 다소 추운 환경에 노출되기 등 고전적인 실천 방식들이 여전히 빠지지 않는다. 장수 유전자가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너스 같은 소식을 하나 덧붙인다. 여러 바이오기업에서 매일 조깅하는 것과 같은 ‘운동효과를 내는 약’을 연구 중이며 10년 내에 시장에 출시된다고 한다. 이제 매일 야식을 먹으며 야근하면서 약값만 벌면 되는 것이다. 청년 같은 노년의 건강이 우리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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