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은 저명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개념까지 동원하며 윤 후보를 두둔했지만, ‘빈곤층은 자유의 필요성을 모른다’는 말 자체는 어떤 요설로도 옹호가 불가능한 발언이었다. 유권자 비하로 들릴 수 있다는 정치공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진단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지난 29일 오후 경북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열린 경상북도 선대위 출범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권일ㅣ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고 한다. 식사자리든 술자리든 웬만해선 선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적 지면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냉소와 혐오 없이 점잖게 대선에 관해 말할 방법을 찾다가, 대선 후보들에게 책 한권씩 권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맘 같아선 <한겨레>가 ‘2021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한국의 능력주의>를 강력 추천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먼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권하는 책이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종 선택한 것은 2012년 출간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이다. 2019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비지트 바네르지와 에스테르 뒤플로의 저서로, 원제는 ‘가난의 경제학’(Poor Economics)이다. 영민한 독자는 왜 이 책인지 단박에 눈치챘을 테다.
지난 22일 전북대에서 윤 후보는 “극빈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를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비난이 쏟아졌다. ‘빈곤층 폄하 발언’이라는 것이다. 물론 윤 후보는 뒤에 ‘빈곤층에 경제적 지원과 교육을 통해 자유의 기초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이긴 했다. 몇몇은 저명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개념까지 동원하며 윤 후보를 두둔했지만, ‘빈곤층은 자유의 필요성을 모른다’는 말 자체는 어떤 요설로도 옹호가 불가능한 발언이었다. 유권자 비하로 들릴 수 있다는 정치공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진단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인식이 저 수준이어선 올바른 정책이 나올 리 없다.
대다수 사람들, 특히 기득권 엘리트에게 극빈층의 이미지는 ‘게으르고 무지하며 불결한 미개인’이다. 저자 바네르지와 뒤플로는 초반부터 가난에 대한 흔한 선입견들을 하나하나 박살 낸다. 실증적 증거와 기발한 실험을 통해서, 이들은 의료, 교육, 금융 등 중대한 삶의 선택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최대한의 합리성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인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대체로 단기적 위험을 회피하는 데 맞춰져 있기에 장기적으로 손해인 경우도 있다.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지해서 혹은 판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선택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윤 후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얼마나 가난에 무지한지를 알게 된다. 또한 빈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혜적 시선으로 결코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역시 노벨 경제학상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란 것도 느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기조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권하는 책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허태준 지음)이다. 지은이는 공고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으로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이 책에 대단한 통찰이나 분석이 담겨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졸자만 “청년”으로 호명되고 블루칼라 청년 노동자는 아무리 죽어도 외면당하는, 참으로 한국적인 현실이 아름다운 문장에 켜켜이 담겨 있어 더 쓰라리다.
이재명 후보에게 권하는 이유는, 공약에서 노동에 대한 깊은 고민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재산세 완화 등 보수 후보 못지않은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노동 정책은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교사 및 공무원 타임오프제,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대한 원론적 강조 정도가 전부다. ‘소년공’ 출신에 ‘과격 진보’ 이미지로 부각된 정치인의 공약에서 노동 의제가 사실상 실종된 연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이른바 ‘중도 표심 잡기’일 터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대통령은 어쨌든 모든 계층 시민들의 삶을 고루 들여다보는 자리이므로.
문제는 일관성, 중심이 없다는 점이다. 진보적 정책과 함께 중상위층 표심 잡기에도 나서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한때 버니 샌더스였다가 갑자기 도널드 트럼프가 되는 식으로 휙휙 변모하는 정치인을 신뢰하기란 난망하다. 이 후보의 탁월한 학습 능력을 보건대 그가 산적한 노동 현안을 모른다고 보긴 어렵다. 그는 잘 알고 있다. 다만 무시하고 있는 거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은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이재명은 아는데 모르는 척한다”는 세간의 농담은 소름 돋게 정곡을 찌른다.
말 나온 김에 심상정 후보, 안철수 후보에게도 적당한 책을 추천하고 싶은데 지면이 부족하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