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만이 아니다. 말로 하면 같은 정보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나 얼굴 표정, 또는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비언어적인 소통 영역이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원거리 소통에서는 이 부분, 즉 ‘인간’에 대한 상상력이나 공감력이 필연적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레 지난 1년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당연히 그것은 이 칼럼 등 내가 쓰는 글에도 반영된다. 글을 쓰는 것은 분명 내겐 기쁨이지만 동시에 고통도 있다. ‘고통’이라고 한 것은 희망 같은 것을 거의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약 1년 전, 나는 이 칼럼에
‘붕괴 과정에 입회하는 나날들―2021년을 맞아’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지난 1년간 붕괴 과정은 더 진행됐다. 코로나 재난은 일본에서는 지난가을 이래 진정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희망적’으로 얘기할 수가 없다. 감염은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바이러스까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일본에 조만간 제6파의 팬데믹이 닥칠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고통’은 나 자신과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위태로워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해 개발도상국에서는 백신 공급의 세계적 불공평을 비판하는 비명과 같은 하소연이 들려온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이 점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선진국 쪽은 그 국민 다수를 포함해서 이런 비인도적인 불평등에 거의 무관심하다. 불평등은 세계 상위 1%의 초부유층 자산이 올해 전체 개인 자산의 37.8%를 차지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교도통신> 12월25일)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극단적인 불평등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들의 ‘야만성’을 이래도 모르겠다는 거냐며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것을 ‘야만’이라 비유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야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자체 속에 그런 ‘야만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어떻게 희망을 말하라는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쓰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 곤란한 삶을 살아갈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남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코로나 재난 때문에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벗들과도 만날 수가 없다. 멀리 떨어져도 연락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만이 아니다. ‘좋다’는 감정을 ‘싫다’는 정반대의 말로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한 일이다. 말로 하면 같은 정보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나 얼굴 표정, 또는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비언어적인 소통 영역이 예술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원거리 소통에서는 이 부분, 즉 ‘인간’에 대한 상상력이나 공감력이 필연적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감염자 수나 구속자 수 등 수치화되고 경량화된 정보는,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잘못된 자기만족을 줄 뿐 오히려 상상력을 저해한다. 예컨대 벨라루스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지금 독일에 망명 중이다. 밤이 이슥해져 홀로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어떤 불안과 고독이 그녀를 덮칠까. 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군인들에게 맞아 죽은 미얀마 젊은이의 어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불법체류’ 혐의로 일본 출입국관리 당국에 구속돼 극도의 건강악화를 거듭 호소했음에도 상대도 해주지 않는 바람에 결국 사망한 스리랑카 여성은 어떤 고통의 신음을 냈을까. 이런 것을 하나하나 상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상상하는 자에게 고통이다. 그 고통 때문에 증언자들은 돌처럼 침묵하거나, 원자폭탄 피폭 시인 하라 다미키나 아우슈비츠 생환자 프리모 레비처럼 자살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고통을 회피해도 될까? 이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궁극의 윤리적 질문이다.
뒤돌아보면 저 1년간 내가 다녀올 수 있었던 미술관은 이와테 현립미술관, 나가노 현립미술관, 그리고 오키나와의 사키마미술관 정도다. 나는 이제까지 수도 없이 사키마미술관을 찾아갔다. 2003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힘든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인권 법률가 라지 수라니씨가 일본 티브이 프로에서 나와 대담을 했다. 그 촬영 장소로 택한 곳이 사키마미술관의 <오키나와 전도(戰圖)> 앞이었다. 무거운 주제를 제대로 논하기 위해 내가 마루키 부처(夫妻)의 작품에서 힘을 빌렸던 것이다.
‘반전화’(反戰畵)의 역사는 18세기 말 고야의 판화 시리즈 <전쟁의 참화>에서 시작된다.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탄압을 두려워하면서도 스페인에 침입한 나폴레옹군의 포학을 몰래 동판화에 새겼다. 스페인 내전 때 피카소는 파시스트 세력에 의한 사상 초유의 전략폭격에 항의해 <게르니카>를 제작했다. 전략폭격이란 적의 전의를 꺾기 위해 민간 비전투원들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긍정하는 전략사상이다. 그것이 나중에 일본군의 충칭 폭격을 거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이어졌다.
이런 반전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마루키 부처의 <원폭도>와 <오키나와 전도>다. 마루키 부처 그림 작업의 중요한 성취는 우선 <원폭도> 시리즈에서 핵무기에 의한 대량살상 전쟁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피해’에서 ‘가해’로 자신의 인식을 심화시켰으며, 나아가 ‘피해’와 ‘가해’의 중층성이라는 윤리적 난문을 파고든 것이다.
예컨대 <오키나와 전도> 시리즈의 <집단자결>(1983)이라는 작품에는 선혈을 흘리며 차례차례 포개지는 희생자들과 함께 낫을 쳐든 인물의 검은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그림을 볼 때 저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동일화돼 스스로를 순수한 방관자의 위치에 놓기 쉽지만, 다음 순간 이 악귀와 같은 인물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 휩싸인다. 아마도 이 인물도 섬의 주민이고, 낫을 내리치고 있는 희생자의 아버지나 형이 아닐까. 아니, 나 자신이 아닐까.
<구메지마의 학살(2)>(그림)에는 목에 밧줄이 걸린 채 끌려가고 있는 앙상하게 마른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 하반신에 어린아이가 매달리고 있다. 희생자 다니카와 노보루씨는 본명이 구중회라는 조선인이다. ‘이카케야’(낡은 금속의 회수나 수리를 하는 업자)로 알뜰하게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민이 일본군에 제보해 ‘스파이’ 누명을 쓰고 일본인 아내와 다섯 아이가 모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구씨의 목에 걸린 밧줄을 끌고 있는 자는 민간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경비병이다. 부산 출신이라는 이 조선인은 어떤 경위로 일본의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왔던 것일까. 오키나와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데 어떤 고충과 기쁨이 있었을까. 살해당하는 순간 조선어 투의 일본어로 아내와 어린아이 이름을 불렀을까? 고향 부산의 풍경이 뇌리를 스쳤을까?
전쟁은 이런 하나하나의 원통함, 분노, 절망, 비탄의 집적이다. 그것을 ‘수치화’할 수 있는가. 이런 고통스러운 윤리적 성찰이 마루키 부처의 그림 작업에서는 인지된다. 한국 사람들은 이 구중회라는 인물을 알고 있을까. 그의 죽음은 우리 조선 민족이 경험한 고통스러운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다. 코로나 재난의 작은 틈새를 빠져나가듯이 해서 다시 찾은 오키나와에서 또다시 무거운 과제를 새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