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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혜성을 피하는 방법

등록 2022-01-06 16:27수정 2022-01-07 02:31

지구를 향해 혜성이 다가온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지구를 향해 혜성이 다가온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돈 룩 업>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우리에게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자는 과학도 있고 위기는 기회라고 주장하는 과학도 있다. 우리가 영화에서처럼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는 정도의 대통령을 만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가 다가오는 혜성에 대해 무엇을 바탕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가늠해보는 것은 과학계 안팎의 모두에게 중요하다.

얼마 전 극장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돈 룩 업>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제발 과학자의 말을 좀 들어라”, “제발 과학을 좀 존중했으면” 같은 반응이 많았다. 수킬로미터 크기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며 6개월 후면 지구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천문학자들의 말을 대통령과 미디어가 무시하고 축소하고 왜곡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답답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온 인류의 생존이 달린 중대한 위험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하는 과학자의 말은 다음 선거 일정이나 연예인 사생활 뉴스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으려 애쓴다고 해서(돈 룩 업) 혜성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혜성 충돌 사건은 허구이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혜성에 기후위기를 대입하기도 하고 코로나19 팬데믹을 떠올리기도 했다.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계산하고 예측하고 권고한 것을 사람들이, 특히 정치인과 미디어가 못 들은 체하거나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선택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현실과 닮아 있었다. 과학자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들기만 하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으련만, 사람들은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본 대로 말하고 아는 대로 말했다가 외면당한 경험이 있는 과학자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과학자가 사실의 생산자이자 전달자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모든 과학이 무시당한 것은 아니다. <돈 룩 업>에 나오는 과학은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천문학자의 계산과 예측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편한 진실로 여겨 회피했지만, 자신을 후원하는 거대 정보통신 기업이 혜성에서 새로운 이윤 획득의 기회를 발견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최첨단 우주 과학기술을 동원하는 것은 적극 지지했다. 다 같이 멸망할 위기를 막아내자는 과학은 무시되었고,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고 지금 추출할 수 있는 모든 이윤을 놓치지 않으려는 과학은 우대받았다. 대립 구도는 과학자와 과학을 무시하는 대통령 사이뿐만 아니라 동기와 목적이 다른 과학들 사이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영화를 본 우리의 반응은 “제발 과학자의 말을 좀 들어라”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어떤 과학을 경청할 것인가”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가지 과학 중 한국에서 더 과학 대접을 받는 것은 어느 쪽인가. 영화에서는 과장해서 묘사했지만, 혜성이라는 생존의 위기를 경제적 기회로 둔갑시킬 정도의 거대 정보통신 기업이 한국에 있다면 대통령과 정부는 그들의 말을 가장 중요하게 들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대통령, 미디어, 대중이 혜성을 발견하고 파국을 경고하는 천문학자 대신 혜성에서 신성장동력을 찾아주겠다는 거대 기업을 믿는 상황은 한국에서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혜성에 대한 무모한 대응은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선진국 도약의 지름길로 쉽게 포장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든 팬데믹이든 이미 닥친 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학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자는 과학도 있고 위기는 기회라고 주장하는 과학도 있다. 전자는 우리의 생존과 평온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는 과학이고 후자는 성장과 번영을 지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위기도 무조건 기회로 만들어 성장하자는 쪽에 초점을 맞춰왔다. 두가지 과학 중 하나만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겠지만 과학의 지향이 단일하지 않으며 이는 정치적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또한 명백한 위기를 기회로 오인하는 과학이 있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다음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과학기술 중심 국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과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국가 운영에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후보는 한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능한 여러 과학 중 어떤 과학을 더 중하게 여길 것인지 밝히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에서처럼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는 정도의 대통령을 만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가 다가오는 혜성에 대해 무엇을 바탕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가늠해보는 것은 과학계 안팎의 모두에게 중요하다. 무조건 과학보다는 어떤 과학인지 물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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