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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피의 여공작’ 악명을 얻다

등록 2022-01-06 16:27수정 2022-01-07 02:31

[나는 역사다] 에르제베트 바토리(1560~1614)

헝가리 귀족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피의 여공작’으로 악명이 높다. 좋은 집안 출신이다. 남편도 명문 귀족에 전쟁 영웅이었다. 남편이 죽자 혼자 영지를 다스렸다. 무척 크고 부유한 땅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왕국을 흔들 힘이 있었다. 권세 많은 높은 사람이었다.

잘나가는 좋은 집 사람은 아랫사람의 힘든 삶을 모른다. 아랫사람은 그런 윗사람을 미워한다. 바토리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바토리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목숨을 잃은 가난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나서야 마티아스 2세 임금은 사람을 보냈다. 수사가 시작되자 바토리가 살인자라는 증언이 쏟아졌다.

바토리의 재판이 열린 날이 1611년 1월7일이다. 바토리가 고문하고 목숨을 빼앗은 사람이 600이 넘는다고 했다. 속사정은 복잡하다. 재판에 나온 증언 대부분이 의심스럽다. 앞뒤가 안 맞고 증인은 믿을 만하지 않았다. 네명의 하인이 결정적인 증언을 했는데, 자백을 하기 직전에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한명은 자기가 마녀라고 자백하고 화형받았다). “바토리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바토리가 죽고 나서 100년 넘게 지나서 처음 등장한 주장이다.

그래서 왕이 꾸민 음모가 아닌가 보는 의견도 있다. 헝가리 왕은 바토리의 남편에게 큰돈을 빌렸다. 남편이 죽은 뒤 돈을 받을 사람은 바토리였다. 바토리가 사형당하면 그 넓은 땅을 왕이 꿀꺽 삼킬 수도 있었다(바토리는 사형을 면하고 죽는 날까지 가택 연금을 당했다). 마티아스 2세가 바토리를 제거할 동기는 차고 넘쳤다.

바토리는 억울한 희생양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재판이 있기 한참 전인 1602년에도 바토리와 남편이 하인을 잔인하게 괴롭혔다는 목격담이 기록으로 남았다. 바토리의 집에서는 몰래 묻은 시신들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 가혹한 벌을 받다가 숨진 하인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이 범죄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바토리의 문제였을 것이라고.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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