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편집인의 눈] 김민정 |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참여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언론은 좀 불안합니다. ‘가장 참여적이고 표현촉진적인 매체’라 불렸던 인터넷이 ‘화살촉’으로 상징되는 선동가들의 폭로, 허위 정보, 혐오와 극단의 언어들로 뒤덮이고 있으니까요. 숙의민주주의가 상정하는 언론은 가능성은 엿보이나 아직 뚜렷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과연 잘 작동할까 싶기도 하고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언론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이 명제에 반대할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좋은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지와 뗄 수 없습니다. 학자들이 민주주의의 유형과 이상적 언론상을 연결 짓는 이유죠. 박영흠 협성대 교수가 ‘포퓰리즘 시대의 저널리즘’이라는 글에서 정리한 세가지 민주주의 모델을 토대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론을 좋은 언론이라고 봅니다. 대의제의 핵심이 투표니 시민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언론이 비정파적으로 사실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거죠. 정치사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하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런데 부패하고 기득권 유지에 매몰된 정치 엘리트들은 사회가 당면한 여러 위기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시민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참여민주주의가 대안으로 부상한 이유죠.
참여민주주의는 포퓰리즘, 온라인 행동주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언론은 변화를 추동하는 적극적 행위자이기를 요구받습니다. 대중의 의지가 정책 결정에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언론이 깊숙이 관여하고 개입하라는 거죠.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객관성과 중립성은 무책임함과 비겁함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중의 참여는 촛불혁명으로 구현되기도 하지만, 8·15 집회, 무차별적인 문자폭탄, 좌표찍기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한쪽에서 ‘참언론’이라 칭찬받는 언론사가 다른 쪽에선 편파왜곡 보도의 대명사가 됩니다.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파성이 꼽히지만, 언론 이용자도 정파적이고 한국적 현상만도 아니죠.
마지막은 숙의민주주의입니다.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형태의 대중 참여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 거론됩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숙의를 거쳐 공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거죠. 숙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충실한 시민교육, 다양한 공론장이 필요합니다. 언론은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고, 여러 관점과 의견을 조정하며, 고도의 성찰과 지성적 토론이 가능하도록 현안을 분석하는, 그런 ‘불편부당한 조정자’여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저널리즘에 부합하는 모델이 있나요? 제 생각엔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에서 그리는 언론은 섭취는 가능하지만 유통기한은 지나버린 식품 같습니다. 참여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언론은 좀 불안합니다. ‘가장 참여적이고 표현촉진적인 매체’라 불렸던 인터넷이 ‘화살촉’으로 상징되는 선동가들의 폭로, 허위 정보, 혐오와 극단의 언어들로 뒤덮이고 있으니까요. 숙의민주주의가 상정하는 언론은 가능성은 엿보이나 아직 뚜렷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과연 잘 작동할까 싶기도 하고요.
꼭 하나의 모델을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의문이긴 합니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적 대의제와 참여형, 숙의형 민주주의의 요소를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으니까요. 언론은 개별 상황별로 적절한 역할을 찾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겨레>가 대통령 후보자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할 때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비정파적 태도로 정확한 사실을 전하길 바랍니다. 동시에, 한겨레가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연재를 시작한 것처럼 언론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길 바라는 이슈도 많이 있습니다. 또 한겨레가 1월 중순에 시작하는 ‘청년 5일장’은 청년 100여명과 대선 후보 캠프가 댓글 토론과 화상 숙의토론을 하는 형태인데요, 이 공론장 실험도 성공하길 바랍니다.
저는 이 글을 끝으로 한겨레 시민편집인 활동을 마칩니다. 처음 썼던 칼럼
‘좋은 저널리즘과 풀꽃’에서 고백한 것처럼 저는 한겨레가 추구해야 할 좋은 저널리즘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1년간 한겨레 보도를 꼼꼼히 살피고, 한겨레 기자들과 직접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가지면서 알게 된 게 있습니다. 한겨레는 고민 중이고 그래서 진행형이라는 겁니다. 개별 기사와 개별 기자 간에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겨레가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에서의 다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겨레 독자께 부탁드립니다. 한겨레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주십시오. 풀꽃을 보는 것처럼 말이죠. 저도 그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