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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등록 2022-01-20 16:47수정 2022-01-22 17:56

공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공간과 다양한 규모의 관심 속에 머무를 시간을 제공한다. 사진 배정한
공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공간과 다양한 규모의 관심 속에 머무를 시간을 제공한다. 사진 배정한

[크리틱]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많이 바쁘시죠? 아주 친하지는 않지만 서로 뭐 하고 사는지 알고 지내는 사람을 만나면 흔히 건네는 인사말이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네, 뭐 그렇죠’ 정도로 답하고 넘어가곤 하지만, 늘 의문이다. 왜 잘 지내냐 대신 많이 바쁘냐일까. 우리는 바쁘게, 즉 시간의 틈새 없이 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아니면 운동이라도 하면서 생산적인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바쁘지 않으면,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여백을 참지 못한다.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쁘지 않아도 될 시간에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맥락 없는 정보에 매달리거나 의미 없는 연결을 갈구하느라 늘 바쁘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타임라인이라도 훑어야 안정감이 든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이 맞춤형으로 추려준 자극을 무방비로 수용하면서 뭔가 바쁘게 생산한 것 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오늘 내 ‘스크린타임’은 무려 세시간에 가깝다. 운전할 때 켠 내비게이션 앱을 빼더라도 두시간이 넘다니. 야구 중계도 안 하는 엄동설한에, 게다가 칼럼 마감 시간도 넘긴 마당에 나는 도대체 휴대폰으로 무엇을 하며 바빴단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저자 제니 오델은 작고 네모난 기기의 생산성 신화에 사로잡힌 관심의 주권을 되찾아 실제 세계의 시공간으로 관심의 방향을 확장하자고 제안한다.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른 체제에서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첫걸음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스마트폰 보는 시간 줄이는 비법을 안내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제니 오델이 인터넷을 거부하거나 디지털 기기를 배격하는 극단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는 익숙함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의 장소에 관심을 기울일 때, 관심의 초점을 디지털 세계에서 물리적 영역으로 옮겨 심을 때, 삶에 여유와 자유가 찾아온다는 주장을 자신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다. 자연으로의 도피나 기술의 회피가 아니다. 우리 곁의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공공장소, 자연환경에 접속해 새로운 관심의 지도를 그리자는 이야기다.

장소감의 생생한 경험이 오델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는 컴퓨터로 작업하기 싫어질 때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공원에 간다. 공원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공간과 다양한 규모의 관심 속에 머무를 시간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앉아 머물다 보니 새를 관찰하게 됐다. 새들을 일부러 찾아내 보는 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앉아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새 관찰은 저해상도였던 장소 인식의 입자감을 바꾸어놓았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새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그들의 소리를 하나씩 배우며 소리와 새를 연결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는 공원으로 들어서며 새들에게 마치 사람인 양 알은체를 한다.

얼마 전 짧지만 즐거운 ‘디지털 디톡스’를 우연히 경험했다. 회의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오르자마자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처음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학과 조교에게 꼭 부탁할 일이 있고, 프로젝트 단톡방엔 나의 확인을 기다리는 파일들이 종일 올라올 테고, 답장을 미뤄둔 중요한 이메일도 여러 통. 세상과 단절된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패닉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회의실 창밖 스산한 풍경이 그 어느 날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표정에 눈길이 갔다. 저녁 약속 전 남은 시간엔 텅 빈 공원에 들러 겨울 노을빛을 마음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맥주는 더없이 시원했고, 대화는 한없이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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