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오늘 집 보러 온 분이 바로 계약하겠다네요. 2월 중순까지 들어온다는데 막상 우리가 이사 예약을 못해서 대략난감.” 설 명절 연휴 첫날, 동네 절친 여성 넷의 단톡방에 올라온 봉실의 톡이다. 전셋집을 부동산에 내놓은 지 오래인데도 좀체 안 나가 걱정하더니 다행이다. 막상 이사 날짜가 잡혔다니 아쉬움도 밀려온다.
봉실이 이사 가는 곳은 협동조합형 민간임대아파트다. 주변 시세보다 저렴할뿐더러 8년 거주가 보장된다. 행정구역은 경기도지만 서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입지도 좋다. “임대라고는 해도 오래 거주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떠날 시간이 다가오니 오십 훌쩍 넘은 나이에 또 임대로 간다는 생각에 상실감이 들어요.” 집 살 결정을 미뤄온 남편에 대한 분노, 자신에 대한 자책이 올라왔다. 마음의 화를 다스리기 위해 봉실은 최근 백팔배를 시작했다.
이사를 앞둔 봉실도 위로할 겸 명절 연휴 마지막 날 ‘벙개’가 잡혔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이 화제였다. “중년의 행복, 삶의 질에는 친구나 이웃 같은 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제일 크대요.” 내 말에 모두 공감했다. 이웃이 가장 큰 복지라는 걸 체감한 우리다. 하지만 노후 불안에 이르자 걱정이 쏟아졌다. 자식 교육과 취업에 부모 부양까지 이중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세대다. 치솟는 집값까지 생각하니 다들 마음이 답답해졌다.
“직장도 있고 소득도 받쳐주니 그동안은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재기가 어려운 나이라는 생각에 더 불안한 것 같아요.” 봉실의 주거 불안, 노후 불안이 어디 봉실만의 고민일까. “마을 이웃들과 어울려 천불회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할 때가 마음이 제일 편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 즐거우니 다른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어요.”
천불회는 한 달에 한 번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생일 축하도 하고 수다도 나누는 모임이었다. 40~50대 여성 십여 명이 모여 세상 사는 고단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누군가 마음속에 맺힌 이야기를 꺼내면 아멘이나 나무관세음보살 하듯 ‘천불난다’ 하며 공감했다. 사이비종교집단 분위기가 물씬 나는 정겨운 천불회였다.
천불회 모임은 누가 더 힘든가를 겨루는 ‘불행 배틀’ 같았다. 모진 시어머니에게 학대당한 이야기, 남편이 사업에 거듭 실패해 삶이 벼랑 끝에 몰린 이야기, 어린 시절 고생한 이야기 등 슬픈 드라마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웃들이 펼쳐내는 불행 스토리를 듣다 보면 내가 짐 진 고통은 사소하게 여겨졌다. 다 함께 불행하다는 생각에 연대감이 솟아나고, 이윽고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찾아왔다. 천불회 모임은 가장 불행한 사람을 ‘천불퀸’으로 뽑고 서로 안아주는 것으로 끝났다.
천불회를 생각하면 영화 <노팅 힐>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애나(줄리아 로버츠)는 작은 여행전문서점의 주인 윌리엄(휴 그랜트)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의 친구 생일파티에 참여한다. 케이크 한 조각이 상품으로 걸린 ‘불행 배틀 게임’이 펼쳐지고 저마다의 불행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대스타 애나가 자기도 불행하다며 나서자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온갖 언론이 신나게 떠들어요. 얼마 후면 내 아름다움은 시들고 인기도 한물가고 그럼 난 퇴물 배우로 사람들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겠죠.” 케이크는 애나 몫이 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뿐이라면 삶은 홀로 견디는 숙명일 뿐이다. 불행을 고백하고 나누면 서로 ‘곁’이 된다. 그 불행이 함께 나누는 위안의 재료가 된다.
천불회 모임에서 내 차례가 되자 동생들은 “언니는 별로 힘든 일이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번듯한 직장에 나름 안정된 중산층으로 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나는 친정어머니와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탓에 평생 일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 돌덩이가 한결 가벼워졌다. 다들 끄덕이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순간 또 깨달았다.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공감하고 돕고 나누는 데서 얻는 위안과 기쁨이야말로 우리의 생존키트라는 걸.
봉실이 이사 가는 곳에도 천불회가 생기면 좋겠다. 힘든 이야기 터놓으며 곁이 되는 이웃을 만나면 좋겠다. 글을 마무리하는 중에 엄마의 교통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병원으로 달려가니 복잡한 수술이 여러 차례 필요하단다. 큰 후유증도 염려된다. 코로나 탓에 입원도 간병도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불행의 시간은 언제든 닥친다. 불행을 나눌 곁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가 서로 곁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