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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수억이 유죄라면

등록 2022-02-14 18:13수정 2022-02-15 02:32

김수억씨는 2019년 7월 말부터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현대·기아차의 불법 파견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시정명령 할 것을 요구하면서 47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단식 30일째의 김수억씨. 한겨레티브이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김수억씨는 2019년 7월 말부터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현대·기아차의 불법 파견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시정명령 할 것을 요구하면서 47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단식 30일째의 김수억씨. 한겨레티브이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편집국에서] 전종휘 | 사회에디터

십수년 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란 기이한 이름의 민사소송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잠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했다. “연봉 수십억짜리 회사 대표이사 지위를 확인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이 회사의 근로자임을 인정해달라’고 노동자가 법원에 소송까지 내야 하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막상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 배경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이 나라엔 실제로 노동자한테 일을 시키면서도 “당신은 내 소속 노동자가 아니니 당신의 노동권을 내게 요구하지 말라”는 사용자가 적잖은 탓이다. 이들은 주로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하청업체 노동자를 자신의 사업장에 불러 일을 시킨다. 말이 사내하청이지 사실상 원청의 지휘, 감독을 받는 파견 형태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파견법은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의 파견을 엄격히 금지한다. 파견 상태에서 2년 이상 일한 노동자는 원청 회사가 직접 고용해야 하고, 불법이 확인되면 기간에 상관없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자신에게 원청의 근로자 지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법률적 배경이다.

21세기 초반 한국의 노동운동은 불법파견 폐지 투쟁으로 불타올랐다. 현대·기아차, 포스코, 한국지엠, 현대제철, 아사히글라스 등에 이르기까지 제조업 노동자 수만명이 법원으로 달려가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이 무려 94일간 곡기를 끊는 등 수많은 노동자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단식과 점거농성, 고공농성 투쟁을 벌였다. 삼성전자서비스 등 서비스 업종 노동자는 물론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징수 노동자 같은 공공부문 노동자들, 최근엔 타다 등 플랫폼 기반의 노동자들도 불법파견임을 인정받았다.

지난주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김수억이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김수억은 2003년 기아차 사내하청으로 일을 시작해 2015년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냈다. 법원은 공판을 끌다 4년 만인 2019년에 김수억을 포함한 비정규직 103명 모두 불법파견에 따른 기아차 노동자라고 선고했다. 2심은 3년째 진행 중이다. 김수억은 이 과정에서 고용노동청과 청와대, 대검찰청 등을 찾아다니며 불법파견 시정과 사용자 처벌을 요구했다. 관청 로비를 점거하고 도로를 막는가 하면 이를 말리는 경찰관과 몸싸움을 벌인 죄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애당초 검찰이 불법파견을 저지른 사용자를 제때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면 수많은 김수억들이 제 몸을 축내는 투쟁을 하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일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검찰은 노동부가 2004년 현대차 9234개 공정은 불법파견이라며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한 데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사용자를 처벌해달라며 제기한 고소·고발도 시간만 끌다 다시 무혐의 처분했다. 대법원이 2010년 현대차 울산공장의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고 전국의 법학과 교수 35명이 정 회장을 고발했는데도 검찰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파견법은 불법으로 노동자를 파견받아 쓴 사용자를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법은 가진 자의 편’이라는 세간의 상식을 검찰이 확인하는 동안 노동자들만 계속 사지로 내몰렸다.

검찰은 여론에 밀린 끝에 2015년 윤갑한 현대차 사장을 불법파견으로 기소하면서도 일상적으로 이뤄진 불법파견은 빼놓고 파견법상 허용된 한시·비상도급 조건을 위반한 혐의만 공소장에 적는 꼼수를 썼다. 4년 뒤엔 박한우 기아차 사장을 기소했는데, 이번엔 간접생산 공정은 빼고 직접생산 공정에서만 위법이 이뤄진 거로 봤다. 지금까지 지법·고법·대법원에서 현대·기아차에 대해서만 40차례 가까운 판결이 났고, 조립·도색 같은 직접생산 공정은 물론 완성차를 부두까지 옮기는 선적 등 대부분 간접 업무까지 불법파견이란 판결이 났는데도 말이다. 박 사장 1심 재판은 2020년 11월 마지막 공판이 열린 뒤 열다섯달째 열리지 않고 있다.

20년 가까이 기소편의주의를 남용해 노동현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노동자를 불법으로 내몬 검사들이야말로 적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억이 유죄라면, 이들 검사도 유죄다.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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