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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파트 복도에서 총에 맞다

등록 2022-02-24 18:03수정 2022-02-25 02:31

[나는 역사다] 이한영(1960~1997)

본명은 리일남. 김정남과 함께 자란 북한의 고위층이었다. 1982년에 망명했다. 와서 보니 남한은 돈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사회였다. 이한영은 재벌이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남한은 무서운 사회기도 했다. 이한영은 방송사 피디로 일했지만 월급쟁이는 큰돈을 벌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1990년 주택조합 사업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남한에 오래 살아서 그의 선택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때 이한영은 몰랐다. 한동안 돈이 벌리는가 싶었는데 끝내는 송사에 휘말렸다. 1993년에는 잠시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듬해 2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민사에서 패소해 재산을 날렸다.

돈을 다시 모으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계속 잃었다. 이 무렵 러시아 상인과 사업을 하다 수상한 사람들과 엮였다는 말도 있다(훗날 ‘러시아 마피아가 이한영을 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돈 것은 그래서다). 결국 집도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아내와 딸과 헤어져 살았다. 한동안 차에서 먹고 자다가 나중에는 선배 아파트 문간방에 얹혀 지냈다. “차비나 밥값이 없어서 만원, 3만원씩 꾸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몸조심을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결혼식 한달 전에야 아내에게 신분을 밝혔고, 사는 곳도 자주 옮겼다. 1985년에는 성형수술도 받았다. 그런데 1996년에는 얼굴을 드러내고 북한 고위층의 생활을 폭로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라는 책을 쓰고 방송에 나갔다. 어째서일까? “생활고에 따른 고육지책”이라고 아내는 회고한다. 김정일은 책과 방송에 화를 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이한영이 납치당하거나 꼬임에 넘어가 남한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이한영은 목숨을 건 셈이다. 그런데 정작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들이 이한영의 뒤를 캤다. 흥신소를 통해 남한 공무원에게 뒷돈을 주고 이한영의 개인정보를 쉽게 얻어갔다. 남한에서 돈이면 안 될 일이 없었다. 1997년 2월15일 이한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총에 맞는다. 숨을 거둔 날이 2월25일이다. 이한영을 궁지에 몬 것은 남한의 자본주의고 그를 죽인 것은 북한 정부였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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