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 칼럼]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한인 생활정보 단톡방에 오늘도 여러 한국식당 메뉴가 잇따라 뜬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한인촌에는 최근 2~3년 사이에 한국식당 4~5개가 새로 생겨서 주말이면 현지인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인기다. 라틴아메리카 최대 한인거주지역인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도 한류에 힘입어 쇠락하던 봉헤찌로(봉헤치루) 한인타운이 새롭게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한인들의 지구 반대편 이주는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4월4일 1033명의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났다. 멕시코 남동쪽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계약노동자였지만, 사실상 노예 같은 삶이었다. 커다란 알로에처럼 생긴 에네켄에서 섬유를 추출해서 선박이나 포대용 굵은 밧줄 등을 만들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140명이 농장을 탈출하고 49명이 숨졌다. 그렇게 한인들의 라틴아메리카 이주는 비참하게 시작됐다.
1997년 여행을 다니며 유카탄반도 메리다에서 1905년 한인 이주의 역사와 마주했다. 나와 비슷한 얼굴의 한인 2, 3세대를 만나기 위해 나선 흙먼지 날리던 길은 무척이나 멀고 낯설었다. 숨막히는 더위와 뙤약볕이 내리쬐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다니, 고단했던 그들의 삶이 아련했다. 1921년 3월 290여명이 쿠바로 재이주를 떠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1960~70년대에는 한국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으로 농업 이민을 떠났고, 이후 주로 원단, 봉제, 의류 사업 등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발전된 오늘날의 한국은 다른 성격의 한인사회도 형성하고 있다. 멕시코 누에보레온주 페스케리아가 그 예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900㎞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기아자동차의 네번째 국외공장이 2016년 중반부터 이곳에서 본격 가동됐다.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총 500만㎡ 규모로 여의도의 1.7배 크기이며 연간 40만대의 차량을 생산할 수 있다. 멕시코 북동쪽 페스케리아는 미국 국경에서 200㎞ 정도 떨어져 있는데, 멕시코 제3의 도시 몬테레이와도 가까워 임금 경쟁력과 우수한 물류 기반 등을 갖췄다. 세계 6위의 자동차 부품 제조국인 멕시코 내수 시장 및 북미, 라틴아메리카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 공장이 세워진 뒤 이 지역은 완전히 바뀌었다. 한국 식당과 슈퍼마켓, 교회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페스케리아(Pesquería)가 아니라, 한국의 스페인어 표기인 코레아(Corea)를 뒤에 붙여 “페스코레아”(Pescorea)라고 부를 정도다. 기아자동차를 뒤에 붙여 “페스케기아”(Pesque-Kia)라고도 한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 지역의 인구는 최근 5년 사이 8~9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기업이 공장 건설에만 10억달러 넘게 투자해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덩달아 새로 형성된 한인사회가 현지인들과 직접 만나는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100여년 전 에네켄 농장으로 시작된 한인의 라틴아메리카 이주 역사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지난 12월에 영국 <비비시>(BBC)의 스페인어 방송인 <비비시 문도>(BBC Mundo)에서 급변한 페스케리아의 사례를 다룬 뒤 멕시코 현지 언론에서도 새삼 주목을 받았다. 문화적 차이야 있기 마련이지만, 더러 한국인들이 다소 권위적이라는 현지인들의 비판도 전해 들었다. 쉽지 않겠지만 페스케리아의 사례가 이 지역 여러 나라에 하나씩 생겨난다면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도 늘어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