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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자연의 어리석음

등록 2022-02-27 17:55수정 2022-02-28 02:31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스틸컷. 메릴 스트립은 혜성 충돌에 대한 위기 대응보다 눈 앞의 지지율 유지에 급급하는 정치인 ‘제이니 올린’ 대통령 역을 맡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 스틸컷. 메릴 스트립은 혜성 충돌에 대한 위기 대응보다 눈 앞의 지지율 유지에 급급하는 정치인 ‘제이니 올린’ 대통령 역을 맡았다. 넷플릭스 제공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혜성이 지구로 떨어지는 롤란트 에머리히의 영화 <문폴>은 그 서사 밑에 능동적인 의지와 의도를 지닌 두 존재, 즉 악한 인공지능과 선한 인공지능이 갈등을 벌인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런 설정은 자연이 인간의 곤경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우리가 마주하는 위협은 우연성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 즉 ‘자연의 어리석음’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을 지운다. 이 사실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우리는 코로나를 해석하는 음모이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쉽게 본다. 영화는 음모론자를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킨다. 홀로 진실을 파악하고 있는 이 음모론자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달의 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지구에 인간을 번창하게 하고자 태곳적 ‘선한’ 인공지능이 행위자로의 자발적 선택으로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영화는 희생 신학으로 넘쳐난다. 인간은 그 존재를 초자연적인 지능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이런 면에서 <문폴>은 <돈 룩 업>보다 훨씬 열등한 영화다. 애덤 매케이의 <돈 룩 업>도 인류가 처하는 재앙을 다루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수긍하며 재앙을 받아들인다. 음모론도 없다. 어둠이 깔린 풍자를 장르로 선택한 것도 좋은 선택이다. 우리가 끔찍한 재앙을 다룰 때 우리는 비극 너머에 있기 때문에 코미디만이 실제 상황의 엄청난 부적절함을 통해 그 참사를 다룰 수 있다.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코미디라는 점을 기억하라.

<돈 룩 업>을 비판하는 이들은 영화가 심각한 위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불편해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영화 속 대통령은 우파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을 연상시킨다. 고개를 들어 혜성을 봐야 한다고 외치는 시위대는 실제 행동은 하지 않고 뻔한 구호만 외치며 텅 빈 스펙터클을 연출한다. 영화는 우파 포퓰리스트를 공격하는 대신 오늘날 지구온난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두 부류인 자유주의적 기득권 세력 그리고 생태주의자 시위대를 조준한다.

<돈 룩 업>의 교훈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음모론자들이 어떤 면에서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자유주의적 기득권 세력의 ‘무의식’에 ‘육체’를 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기득권 세력은 위협의 현실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진정한 부정론자인 것이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으면서도 총리 관저에서 방역수칙을 위반해가며 여러번 파티를 열었다. 코로나의 존재를 알면서도 자신은 그 위협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대통령은 지구에 혜성이 충돌해도 다른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지 않는다는 듯 행동한다.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진짜 대상은 노골적인 부정론자가 아니라 가짜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기득권 세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문폴>에서처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음모론자를 따르거나, <돈 룩 업>에서처럼 최후의 식사를 나누며 지구가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일까? 세번째 대안이 있다. 그것은 자연의 무의미성을 유물론적으로 수긍하는 일이다. 인간은 어떤 지능의 희생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지구 생명체에 우연히 발생했던 거대한 파괴와 고통 위에 존재한다. 인간은 공룡이 멸종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도 거대한 파괴 뒤에 남은 석탄과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살아간다. 인간은 지구의 고통에 의존해 산다. 공장식 축산 농장의 닭과 돼지를 떠올려보라.

인간은 환경의 재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앙에서 출현하여 그것을 먹고 사는 존재다. 지구 생명체에게는 영화 속 혜성이 바로 우리 인간이었다. 지구가 치른 모든 희생은 인간이 자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 같은 곳에서 처벌을 선고받는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고통 뒤에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성을 수긍하는 것이다.

번역 |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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