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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햇빛이 불러온 풍파

등록 2022-03-06 17:59수정 2022-03-06 19:32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태양은 공평하게 사방으로 빛을 내보내지만, 이 땅이 받는 일사량은 지역마다 다르다. 지구가 탄생할 때부터 둥글게 생긴 탓이다. 적도 지역은 햇빛의 부국이고 극지는 햇빛의 빈국이다. 한쪽은 쌓여 가는 부를 지키고자 하고 다른 쪽은 부족한 부를 빼앗아 오기를 꾀한다. 그 사이에 첨예한 대치 전선이 펼쳐진다. 전선의 한가운데선 국지전이 일어나고, 눈이나 비가 내린다. 전선이 지나며 곳곳에 남긴 생채기는 햇빛의 에너지를 여러 지역에 전달해주기 위한 대기의 몸부림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전투가 격화되어 대지가 피로 물들고 나면, 다음날 하늘에서 비가 온 것을 예민하게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하늘에 폭탄을 터트려 전쟁 분위기를 돋우면 비를 오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국 산시성에서는 우박이 내릴 것 같으면 복숭아 재배지를 보호하기 위해 비구름을 향해 수십 발의 박격포를 쏴서 효험을 봤다는 현지 관계자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런 시도가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날씨와 전쟁 사이에 감도는 묘한 알레고리까지 외면하기는 어렵다.

모형으로 만든 지형도 위에 포병 부대나 기병대를 비롯해 군단을 마음대로 배치해보고 상대 전술을 머릿속에서 실험해보는 방식은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대치하는 군단을 홍군과 청군으로 표시하고, 양쪽 군단의 세력이 대치하는 곳은 전선으로 나타냈다. 모형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만, 대신 전황의 전모를 통찰하고 다양한 국면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을 길러준다.

비슷한 시기에 날씨의 전황도 본격적으로 일기도 위에 그려내기 시작했다. 고기압권은 대기 군단을 대표한다. 공기가 많이 압축되어 밀도가 높은 것이, 병사를 끌어모아 군사력을 집중한 것과 닮은꼴이다. 기압이 높고 차지하는 면적이 넓을수록 대기 군단의 세력도 강하다. 차가운 고기압 군단은 청군이고 따뜻한 고기압 군단은 홍군이다. 양쪽이 대치하는 곳에 기압골을 그려 넣고, 첨예하게 힘을 다투며 밀고 밀리는 곳은 전선으로 표시했다. 전쟁 모형에 쓰던 군단과 전선의 표기 방식을 일기도를 분석하는 데 갖다 쓴 것이다.

일기도에 등장하는 한반도 주변의 기압 배치는 선조들이 겪은 전란의 역사만큼이나 주변 세력 간 치열한 대결의 연속이다. 겨울이 오면 차가운 시베리아 고기압 군단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전선도 남하한다. 북방의 거란이나 여진족은 말들이 살찌고 압록강이 얼어붙은 겨울에 시베리아 고기압이 확장하듯이 북풍의 한기와 함께 기습적으로 한양까지 밀고 내려왔다. 반면 여름이 되면 덥고 습한 북태평양 고기압 군단이 세를 몰아 전선을 한반도로 밀어 올린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 열도까지 북상한 장마전선을 따라 남해안으로 왜적이 침입해 왔다.

중위도 지역은 살기 좋은 온대기후에 속한다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늘 햇빛이 일으킨 풍파의 중심권에 놓여 있다. 지중해권은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에 비가 오며 대체로 온화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름에 습도가 높고 비가 많아 푹푹 찌고, 겨울에는 차고 건조한 칼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게, 온대기후치고 유별나다. 오죽했으면 한국전쟁 중에 외국 전문가가 기상학적으로 조선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을까. 계절마다 극과 극의 기후를 가진 두 기단이 한반도에서 뒤바뀌는 동안 전선대를 지나는 폭풍우도 거세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거대 세력 간 감정의 기압골이 깊어지더니, 전선이 확장하면서 도심 곳곳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뮤지컬 <회전목마>에 나오는 노래처럼, 폭풍우 속에서도 고개를 들고 전진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코 혼자 걷는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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