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록 2022-03-07 20:32수정 2022-03-07 21:45

러시아군의 침공을 피해 폴란드로 넘어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5일(현지시각) 저녁 바르샤바 중앙역에 자리를 펴고 누워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러시아군의 침공을 피해 폴란드로 넘어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5일(현지시각) 저녁 바르샤바 중앙역에 자리를 펴고 누워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편집국에서] 정은주 | 콘텐츠총괄

사건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하는 난민을 취재하려고 폴란드로 향하고, 밤하늘을 검붉게 물들인 산불로 수천명이 대피한 화재 현장에도 여럿, 기자들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여성, 어린이들이 모여드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한겨레> 기자들은 6일 도착했습니다. 10시간으로 예정됐던 비행시간이 2시간 지연돼 새벽 1시30분에야 ‘도착 보고’ 문자가 왔습니다. 비행기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야 했는데 전쟁으로 우회로를 택했다고 합니다. 이날 국내선을 이용해 폴란드의 남동부 도시 제슈프로 이동한 뒤 자동차를 빌려 국경도시 프셰미실까지 가려고 했는데, 그 국내편마저 취소돼버렸답니다. “(취재) 계획이 다 틀어졌네요.” 현장 기자의 문자에서 곤혹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 감정은 폴란드에서 취재하는 동안 수시로 찾아올 것입니다.

애초에 취재 계획이 불가능한 현장도 있습니다. 지난 4일 낮 12시40분께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 야산에서 불이 났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강풍을 타고 퍼져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기지까지 산불이 위협한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졌습니다. 경북·강원 지역을 취재하는 기자들뿐 아니라 서울에 있는 기자들도 재난 현장으로 투입됐습니다. 예고도 없이 출장을 떠난 이들은 나흘째 그곳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몇몇은 돌아오겠지만 산불이 꺼지지 않는 한 몇몇은 계속 남아야 합니다.

사건 현장에 기자가 달려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만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저는 2014년 4월에 배웠습니다.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낙인찍힌 채 취재해야 했던 그 세월호 침몰 참사 현장에서 말입니다. 현장에 도착한 것은 4월19일이었습니다. 진도행 첫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저는 피해자 가족을 당연히 취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2년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던 중국 민항기가 추락해 100명가량이 숨진 사건을 취재할 때도 생존자를 인터뷰했고, 그 뒤 10년 가까이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취재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는 진도 실내체육관 2층에서 멍하니 앉아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형광등을 환하게 비춰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울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엄마, 아빠를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기자 명함을 내미는 순간, 혐오의 시선이 내리꽂혔기 때문입니다. 그 혐오는 4월16일 사고 당일 나온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최악의 오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오보로 유가족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고 방심한 정부는 초동 조처에 실패했습니다. 그러고도 언론은 정부의 보도자료를 검증 없이 받아쓰고 피해자의 대화를 몰래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사고 9일 만에 단원고 한 여학생이 등교하며 언론인의 꿈을 포기하며 쓴 글(‘대한민국의 직업병에 걸린 기자분들께’)에는 실망과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저의 꿈이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자) 여러분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신념을 뒤로한 채, 가만히 있어도 죽을 만큼 힘든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저 업적을 쌓아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앞뒤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세월호 참사 보도를 계기로 재난보도준칙을 만들고 정확한 보도, 단편적 정보의 보도 자제, 선정적 보도의 지양 등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 원칙이 무너질 때도 간혹 있지만, 현장 기자들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는 나침판 역할을 분명 하고 있습니다. 취재를 지시하는 제게도 그렇습니다. ‘속보 경쟁에 치우쳐 현장 기자에게 무리한 취재를 요구함으로써 정확성을 소홀히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재난보도준칙 10조) 사건 현장에 기자를 보내며 되뇌는 문장입니다.

eju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1.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이제 ‘사랑꾼’ 김건희 여사를 확인할 시간 2.

이제 ‘사랑꾼’ 김건희 여사를 확인할 시간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3.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사설] 특감으로 ‘김건희 특검’ 막겠다는 여권, 민심은 안 무섭나 4.

[사설] 특감으로 ‘김건희 특검’ 막겠다는 여권, 민심은 안 무섭나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김명인 칼럼] 5.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김명인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