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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우크라이나의 수학 전통

등록 2022-03-09 19:36수정 2022-03-10 02:31

여담
4년에 한번 열리는 세계 수학자 의회가 올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취소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눈 덮인 그리보예도프 운하. 상트페테르부르크/타스 연합뉴스
4년에 한번 열리는 세계 수학자 의회가 올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취소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눈 덮인 그리보예도프 운하. 상트페테르부르크/타스 연합뉴스

김민형 |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며칠 전 러시아 출신 수학자인 하버드대학의 데니스 게이츠고리에게서 우리 세대 수학의 전설적인 거물 중 하나인 블라디미르 드린펠드가 보낸 이메일을 전해 받았다. 그는 세계 수학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상황의 다급함을 알리면서 자선단체들을 통해서 그쪽으로 기부금을 보낼 것을 당부했다.

드린펠드는 우크라이나가 낳은 최고의 수학자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1954년 하르키우에서 태어나서 60년대 말에 이미 학술지에 연구 논문을 기고할 정도로 신동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는 소련 수학의 중심인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 가서 학부와 박사과정을 마친 후에 하르키우로 돌아와 1981년부터 1999년까지 그곳에 있는 저에너지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소련 학문 시스템에서는 수리 과학의 의미가 광범위했기 때문인지 수학자들은 상당히 다양한 직장을 배정받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어떤 정규직이라도 찾을 수만 있으면 고맙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드린펠드는 하르키우에 사는 동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논문을 여러 편 저술해서 1990년에는 수학자들이 최고의 영예로 간주하는 국제수학연맹의 필즈상을 수상했다. 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면서 동구권 수학자들이 미국과 서유럽으로 홍수같이 밀려 나오는 가운데서도 고독한 재야 학자의 성격이 강한 드린펠드는 큰 흔들림 없이 하르키우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1999년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임용되면서 결국 고향을 떠났다. 여행조차 극히 꺼리던 드린펠드가 이민한 것은 세계 수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드린펠드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수학적 대칭성을 나타내는 대수적 구조인 ‘군’이라는 개념을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원리와 결합해서 만든 ‘양자군’ 이론의 개발일 것이다. 이 이론은 양자 통계역학의 주요 시스템들을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고 수학 내에서는 대수와 거리가 멀 것 같은 위상 수학의 기반을 혁명적으로 재구축한 ‘위상 양자장론’의 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드린펠드는 국제 수학의 주류에 속하는 연구에 지속적으로 집중했지만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 성향이 그의 독창성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인상이다. 물론 소련 수학 문화의 깊고 다양한 저변에 힘입은 바도 많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뛰어난 수학자는 드린펠드 외에도 여럿이다. 20세기 수학의 대부라고 할 만한 이스라엘 겔판드(1913~2009), 이고르 샤파레비치(1923~2017), 그리고 블라디미르 아르놀드(1937~2010)가 각각 헤르손, 지토미르, 그리고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세명 모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의 목록에 등장할 만한 거장들이었고 소련 수학 특유의 풍성한 독창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구실을 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이들이 ‘진짜 우크라이나인’인가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복잡한 혈통과 문화적 조류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기에 나는 이 질문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는 등 연고가 강했던 사람은 그곳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세기 학자들까지 돌아보면 전자기학의 맥스웰 방정식 중 두개와 거의 동치 관계에 있는 미적분학의 ‘발산 정리’를 처음 증명한 사람인 오스트로그랏스키(1801~1862)가 우크라이나의 도시 크레멘추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원이 모호한 유라시아 유랑민족 코사크의 후예일 것이라는 추측이 그 지역 사람들의 인종적 복잡성을 잘 표현한다. 지금 현재 활동하는 수학자 중에는 스베틀라나 지토미르스카야(1966~)가 하르키우 출신이고 마리나 비야조우스카(1984~)는 키이우 출신이다. 두 사람 모두 2022년 세계 수학자 의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기로 예정돼 있고 비야조우스카는 이번에 필즈상 후보로 유력하다.

4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세계 수학자 의회는 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수학연맹은 긴급회의를 소집해서 계획을 취소하고 의회의 모든 강연을 비대면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2014년에 서울에서 세계 수학자 의회가 개최됐을 당시에 수상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필즈상을 받았다. 올해는 어쩌면 푸틴이 필즈상 시상자로 나설 수도 있었다. 최근 대화에서 어떤 러시아 수학자는 원래 계획대로 의회가 러시아에서 열렸더라면 푸틴이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수학자에게 상을 수여하는 기이한 드라마를 연출했을 것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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