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이 패배자가 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가치와 철학을 갖춘 지도자를 주야장천 기다리느니 가치와 철학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깃발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개혁과 상생을 위한 시민연대가 필요하다. 이제 겨자밥은 그만 먹자.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월드컵 결승전도 아닌데 티브이 앞에서 밤을 새웠다. 그렇게 하룻밤 잠을 설친 후유증은 일주일이 지나도 쉬 가시질 않는다. 대선 후유증이다. 국민의힘이 잘해서 이긴 선거라기보다 민주당이 못해서 패한 선거라 더 씁쓸하고, 앞으로도 특별히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더 암담하다.
이번 대선이 역대 최악의 선거라는 표현은 사실 어폐가 있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고무신과 막걸리로 표를 매수하던 이승만, 박정희 시대도 있었고 광주학살의 주범을 99.37% 찬성으로 뽑은 전두환 시대의 체육관 선거도 있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시대에도 공공연한 공개투표로 여당 후보를 찍도록 강제하는 군대 내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본 꼴도 갖추지 못한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인데 이번 선거의 체감온도가 최악인 이유는 뭘까? 이번 대선은 과거 어느 때보다 국민의 눈높이와 정치권의 수준 사이에 가장 큰 간극이 발생한 선거이기 때문이다.
20대 대선은 5년 전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를 한 이후 처음 맞는 대선이다. 촛불 전과 후의 국민은 다르다. 촛불 하나 달랑 들고 거대한 통치권력을 무너뜨린 자부심과 기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목마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유권자 앞에 던져진 선택지는 참담했다. 양당 후보의 개인 비리와 가족 비리는 까도 까도 양파처럼 점입가경이고 표심 잡기용 아무말 대잔치가 경쟁적으로 난무했다.
국민의힘은 ‘닥치고 정권교체’를 위해서 젠더 간, 지역 간 혐오와 분열을 재생산하는 데 핏발을 세웠고 민주당은 수도권 민심을 잡겠다며 재개발 요건 완화, 종부세 감면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수를 자처하는 국민의힘에는 공공선을 위한 공화주의가 없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에는 자산격차와 불평등 해소에 대한 지향이 없었다. 그것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권력 획득을 위한 이익집단 간의 경쟁일 뿐. 이번 선거는 앞으로 전진하려는 국민의 추동력을 후진기어로 역진시키려는 두 바퀴 양당 권력 간의 거대한 힘겨루기였고 누가 당선자가 되든 패배는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앞으로 어떤 정국이 펼쳐질까? 다당제와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해온 안철수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민주당은 지난달 긴급의총에서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반드시 실천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한다면서 위성정당 방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을 뼈대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채택했다. 안철수 인수위와 민주당 비대위는 양당체제 종식을 위한 정치개혁의 약속을 지켜낼까? 부디 그러기를 간절히 두 손 모아 기원하지만,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양당은 서로 적대하며 공생과 장생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꼼수 위성정당을 만들어서 비례대표를 싹쓸이하는 데서나, 기초의원 선거구 쪼개기로 양당 이외의 군소정당 후보가 등장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는 데서도 양당의 행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은 여소야대 정국을 버텨낼 수 있게 힘을 몰아달라고 할 것이고,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를 견제하려면 민주당으로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호소할 것이다. 땅 가진 사람, 지역 기득권을 유지해온 토호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해서 도처에서 개발 공약과 유치 공약이 여야 구분 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선 투표에 임해야 했던 유권자들에겐 다시 겨자 가득한 선택지가 주어질 공산이 크다.
그래도 이민 갈 생각은 하지 말자. 개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이 패배자가 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40 대 40의 고정지지층 외에 나머지 20%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한다는 게 통설이다. 이번엔 그 20%를 양당이 엇비슷하게 나눠 가졌지만 이들은 언제든 선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양당이 깊이 인식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지지 못하게 하자.
혐오정치에는 또 다른 백래시가 따른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준 2030 여성들, 차악을 선택하느니 투표를 거부하거나 무효표를 만드는 길을 택한 저항적 유권자들, 맹신과 광기로 가득한 팬덤 정치꾼들의 선동에도 꿋꿋하게 진실을 가려보려고 했던 합리적 시민들, 그리고 이 당이 싫어 마지못해 저 당에 투표했지만 품격이 다른 정치를 열망하는 대다수 유권자의 간절한 마음이 새 출발의 보루이다. 가치와 철학을 갖춘 지도자를 주야장천 기다리느니 가치와 철학을 가진 시민들이 새로운 깃발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개혁과 상생을 위한 시민연대가 필요하다. 이제 겨자밥은 그만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