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과 거리 두기를 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김은형 | 문화기획에디터
줄 서서 기다리던 나의 순서가 왔는지 결국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먼저 걸린 지인들이 저마다 거의 무증상에서 ‘죽다 살아난’ 투병기까지 다채로운 경험담을 공유해 목이 칼칼하고 이마가 뜨끈뜨끈해질 무렵 나는 얼마나 앓게 될지 긴장됐다. 하지만 코로나 지옥은 내 몸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옮겼는지 나에게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반나절 차이로 아이 먼저 확진이 됐다. 전부터 학교와 학원을 일주일 쉴 수 있다는 이유로 코로나 걸리길 소망했던 아이의 열꽃 핀 붉은 뺨이 미소로 터져나갈 듯했다. 둘 다 끙끙 앓던 이틀간은 그나마 평화 공존의 시간이었다. 싸울 기력이 없는 부모·자식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
아이가 기운을 차리고 자유시간을 만끽하기 시작하면서 짧은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워서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게임을 하다가 밥을 먹을 때는 유튜브로 갈아타는 아이의 야무진 시간 활용을 보며 내 이마는 코로나보다 위험한 심인성 고열로 끓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미 붉으락푸르락하는 내 얼굴 앞에서 게임이 잘 안되니 스마트폰을 바꿔야겠다는 둥, 밥 대신 매운 닭발을 주문해달라는 둥 내 체온을 올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전에도 썼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교훈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일 텐데, 이런 깨달음을 가장 뼈저리게, 지속해서 경험하는 게 자식을 키우는 데서인 듯하다. 누구든 배 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을 때는 어쩐지 외모는 조인성이나 수지의 키와 얼굴에, 머리는 과학고 수석 합격, 인성은 몸이 불편한 친구를 업고 3년 등하교 하는 아이가 태어날 것 같은 꿈에 젖는다. 나는 이런 바람을 누설했다가는 어쩐지 벌을 받을 것만 같아서 단 하나만 선택한다면 훤칠한 키를 가졌으면 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초등 6년 내내 반에서 생일은 제일 빠른데 키는 제일 작지 않아서 다행인 아이를 키웠다. 심지어 내 키가 조회시간 때마다 맨 뒤를 다퉜을 정도로 큰데도 말이다.
물론 이제 사춘기에 진입한 아이가 먼 미래에 어떻게 자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삼한사온처럼 사일은 평온하고 삼일은 죽이네 살리네 전쟁을 벌이는 육아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포털 검색어 조회수처럼 우리 집 사용어를 따지면 “때려치워”와 “그렇게 하려면 집 나가”가 압도적 1, 2위를 차지할 것이다. 아이와 전쟁을 벌이고 나면 아이한테 가혹하게 대한 것보다 훨씬 더 큰 내상을 입는다. 왜 내 아이는 누구네 집 아이처럼 성실하지도 않고, 누구네 집 아이처럼 비범하지도 않고, 누구네 집 아이보다 열정적으로 게임에만 환장하는가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가 나는 십몇년을 아이를 키우고도 내 아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결국 나와 아이를 분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말일 터다. 몇년 전 한 유명 사립대 교수와 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신임 학과장의 어머니가 학과로 전화해 왜 자신의 아이에게 힘든 일을 시키냐고 거세게 항의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극단적 분리 실패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운 좋게 궁합이 찰떡같이 맞는 자식을 키운다면 이처럼 분리 실패에 대한 좌절도 없으리라.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부모는 열세살만 되면 까치집 머리로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가 알아서 한다구!”를 외치는 독립심 넘치는 아이를 키우는 탓에 자식과의 거리 두기가 과제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거리 두기는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의 어떤 고난도 과제보다도 힘들어 보인다. 진보적 유력 인사들이 자식 문제에서 선 넘는 행동으로 지탄받는 것도 그 밑바닥에는 자식과의 거리 두기에서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힘들어하는 과제, 하지만 풀어야만 하는 과제에 아이는 적절한 조력자 또는 파트너가 되는 것 같다. 부모가 아무리 극한 공포를 제공해도 바락바락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 마는, 유순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대답은 부모의 화를 더 돋우지만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양가적인 생각이 든다. 아이가 입 다물고 부모에게 대들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 집 육아는 본격적으로 잘못되기 시작할 거라는 예상. 그래서 열 받으면서도 가끔 속으로 아이가 꺾이지 않기를 응원한다. 부모든 아이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 대를 이어 어리석은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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