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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과학기술과 국정 운영

등록 2022-03-17 16:01수정 2022-03-18 15:20

과학기술은 다른 나라를 제치고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켜 패권을 잡아야 하는 시합의 종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 사용후핵연료, 우주탐사,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 의제는 한국의 선진국 진입 달성보다는 과연 인류가 지구에서 어떻게 생존해나갈 것인지 모색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6일 오후 점심 식사를 하러 안철수 인수위원장, 권영세 인수위 부위원장, 원희룡 기획위원장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에서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6일 오후 점심 식사를 하러 안철수 인수위원장, 권영세 인수위 부위원장, 원희룡 기획위원장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에서 식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기후위기로부터 한반도를 구하기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디지털 플랫폼 기업이 혁신과 공정을 동시에 성취하게 하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합니까?” “포화가 임박한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고 정의롭게 처분하기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지방 소멸’ 시대를 맞아 비수도권의 과학기술 활동을 진흥하기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인공지능이 효율적이고 윤리적으로 사용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책과 교육은 무엇입니까?” “국가의 지원을 받은 과학기술 연구 결과가 공공에게 더 신뢰받는 지식으로 향유되도록 하는 정책은 무엇입니까?” “‘신성장동력 만들기’를 넘어서는 정부 연구개발의 목적과 철학은 무엇입니까?”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기초과학을 육성하기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과학기술계의 소수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하도록 도울 수 있는 방안은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이 달을 탐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0대 대통령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작년 말 내가 재직하는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발행한 <대통령을 위한 열 가지 과학 질문> 리포트에 실린 질문들이다. 다 읽어 내려가기만 해도 머리가 무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각 정당과 후보가 나름대로 답을 한 것도 있고 공론장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고 넘어간 것도 있다. 달콤하고 화려한 약속의 시간이 지나고 현실적인 결정과 실행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다시 한번 이 질문들을 꺼내볼 만하다.

“과학 질문”이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다 다룰 수 있는 사안들은 아니다. 열 가지 질문에 담긴 과학기술 의제를 다루는 데에 참여해야 할 정부 부처를 꼽아보자.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여성가족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교육부,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법무부,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기획재정부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의제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18개 부 어느 곳도 과학기술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과학기술은 단지 새로운 산업과 부를 창출하여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라는 운동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잘 살아내는 일에 필요한 바탕이기 때문이다.

열 가지 질문에는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면 뚝딱 계산해서 정답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하고, 세계관과 이념이 부딪히기도 하고, 다른 복잡한 현안들과 얽혀 있기도 한 문제들이다. 데이터만이 아니라 가치와 철학을 함께 논해야 하는 사안들이다. 가령 모든 과학자가 차별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연구하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대통령도 동의하고 전문가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키우고 싶다면 더 민감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과학자를 꿈꾸거나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 여성이 겪는 차별과 배제는 구조적인 문제인가 개인적인 불운인가. 대통령을 위한 과학 질문은 곧 젠더 질문과 노동 질문이기도 하다.

열 가지 과학 질문은 또 2020년대 한국이 과학기술을 추격 또는 선도의 국제 경쟁 구도로만 다룰 수 없음을 시사한다. 과학기술은 다른 나라를 제치고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켜 패권을 잡아야 하는 시합의 종목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 사용후핵연료, 우주탐사,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 의제는 한국의 선진국 진입 달성보다는 과연 인류가 지구에서 어떻게 생존해나갈 것인지 모색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이제 한국의 과학기술도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국제적 흐름에 적극 동참할 때가 되었다.

고민거리가 많을 대통령에게 굳이 과학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과학기술 의제가 과학기술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을 과학기술 전담 부처의 업무로만 간주하고 여성, 노동, 환경, 기후 등 다른 주요 의제와 분리한다면 열 가지 과학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다. 과학기술은 국정과 민생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국 사회는 지구라는 행성과 연결된다.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국정 운영이란 바로 이런 관계를 이해하고 더 나은 관계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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