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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양희은의 어떤 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오랜 꿈…코미디언

등록 2022-03-27 14:55수정 2022-03-28 02:00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우리 집은 비계에 온통 둘러싸여 있다. 한 달 넘게 창을 열 수 없으니 답답하다. 직접 지은 지 25년이 넘었고 수시로 손을 봤지만 큰 수리는 이번이 세 번째이다. 집 안에 사람이 살면서 하는 수리는 고스란히 소음과 먼지, 일하는 이들이 드나드는 어수선함을 톡톡히 감수해야 된다. 그러니 살면서 할 짓이 못 된다고 다들 고개를 젓는 거겠지. 그래도 뭐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일이니 되도록 무감각 무덤덤하게 마음 비운 채 정신 시끄러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 와중에 엄마는 앞니 3개를 발치하고, 헐거운 틀니 보완하느라 주 1회씩 서울 시내 치과로 외출하셨다. 다양한 죽을 사다 드리면 어느 날엔 죽이 싫다셔서 또 부드러운 식사를 챙기느라 동생과 나는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도 이것저것 이상하게 섞어 다른 식구들은 먹을 수 없는 창작요리를 만드시고, 작은 냄비 두어개에 담아 다 당신이 잡수실 테니 걱정 말라시더니만 날이 풀리면서 뒷베란다에서도 상해 버리곤 했다. 씹을 수가 없어 채소와 과일을 섭취 못하니 주스로 만들어 드시는데 당뇨환자에겐 달달한 과일이 금물인지라 나는 그만 소리를 질러버린다. 혈액이 맑지 못하니 가렵다고 자꾸 긁어대고…. 그래서 영양×식사×운동 ‘건강습관 워크숍’에 등록해 컬러푸드와 항암 식이요법, 감염병 시대에 장건강을 지키는 면역강화 식이요법 등 두 가지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다들 모여 음식과 건강에 관한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배운 것을 엄마께 설명을 해드렸지만 소용없다. 당신이 한번 뜻을 정하면 기어코 잡수신다. 대책이 없다. 너무 명료한 기억력에, 치매답지 않은 치매인데는 제일 집착하는 게 음식이다. 후각도 놀랍다. 맛있는 냄새엔 어김없이 부엌에 나오셔서 훈수를 두신다.

우리 부부도 치과, 가정의학과를 돌았다. 백자처럼 하얀 진료 대기실이 텅 비어서 오후 4시30분 예약이 한갓지고 괜찮네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다 오미크론 확진이어서 못 오고 취소 전화만 종일 받았단다. 정말 너무하다 싶게 한 집 걸러 다 확진이다. 특히 방송가는 놀라울 정도로 심하다. 마스크 벗고 녹화하니까 도리가 없다. 아기들 확진도 많아서 맞벌이하는 댁에서는 정말 갑갑한 일이겠다.

어제는 남편이 프리지어를 푸짐하게 사왔다. “산소에 놓을 꽃 사러 간 김에 당신이 좋아하는 프리지어가 있길래….” 매운 추위가 풀리면 큰 새우젓 항아리를 깨끗이 씻어 개나리나 조팝나무 가지를 넉넉히 꽂아놓는 게 이 남자의 봄맞이=봄바람이다.

지난번 글에 큰소리보다는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 더 잘 들리고, 실지로 귓속말이 제일 강한 소리라는 설이 있다고, 다큐 내레이션 중에는 김영옥 선생님의 힘 다 빼고 하시는 그 톤이 너무 귀하고 가슴을 울린다고 썼다. ‘뜨거운 씽어즈’ 뒷얘기가 요즘 장안에서 뜨겁다. 나문희 선생님의 “내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전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출연하기도 했고, 노래를 위해 무대에 선 건 82년 인생 처음!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 자기 분야가 아닌 일에 대한 선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린 날 또는 평생 가슴에 품었던 이루지 못한 꿈의 직업이 내게도 있는데 그건 ‘코미디언’이다. 노래하는 이미지와 안 맞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개그 하는 친구들이 많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한번 꺾고 어지간히 심한 다툼에도 누가 먼저 웃겼느냐로 승패가 갈리니까, 그게 마음에 든다. 얼마나 좋은가? 개그 하는 친구들 뒤안에는 하나같이 남모를 아픔과 슬픔, 삶의 그늘이 깊어 그 웃음들이 더 애틋하다. 전유성 선배는 평생 꿈이 코미디언인 나를 위해 대본을 써두었다며 환갑 선물이라 했다. 그 얘기 들은 지 11년이 지났다. 그래도 언제든 한번 도전해보라셨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도 흐릿해지고, 힘세고 기운차 에너지 넘치는 것보다 잔잔함이 편하고, 기운 쎈 천하장사 같은 사람 대하기도 싫다. 엄마가 <동물의 세계>를 보다가 “아이구, 얘 딴 데 틀어, 못 보겠다” 하셨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잡아먹고, 먹히는 게 우리 세상에도 흔한데, 굳이 티브이(TV) 화면으로 보기는 더 더 싫다.

세월이 갈수록 깔깔대며 웃을 일이 없다. 씨익 내지는 피식 웃지, 눈물 나게 웃어본 지는 꽤 되었다. 그렇게 한번 웃고 싶다. 흐드러지는 봄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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