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된 가브리엘 보리치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산티아고/로이터 연합뉴스
[통신원 칼럼]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세대 교체” “문화혁명” “페미니스트 정부”. 당선 당시 만 35살, 이제 막 36살이 된 대통령과 같은 30대의 장관 7명(이하 임명 당시 기준). 24명의 장관 가운데 14명이 여성인 내각. 지난 11일 출범한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정부의 각료 구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수치 못잖게, 변화는 지난 1월21일 새 내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눈에 띄었다. 공식 석상에서 32살의 안토니아 오레야나 여성·성평등부 장관 지명자는 어린 아들을 팔에 안고 있었다. 33살의 카밀라 바예호 공보장관 지명자는 앳된 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아이들의 등장으로 엄숙함 대신 가족이 사진을 장식했다. 이런 모습은 1990년 파트리시오 아일윈 정부 내각의 기념사진과 비교돼 주목받았다. 30여년 전 기념사진 속, 장관들은 모두 짙은 색 양복에 전부 넥타이를 맨 남성이다. 당시 30대 장관도 있었지만 2명이었다.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2006년 첫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했지만, 30대 장관은 3명뿐이었다.
파격은 단순히 나이에만 있지는 않다. 칠레에서 대통령 다음의 행정부 서열로 치안도 담당하는 내무장관은 35살의 이스키아 시체스가 맡았다. 칠레의 첫 여성 내무장관이다. 국방장관에도 여성인 마야 페르난데스(50)를 임명했다. 대통령 취임식 날, 도심 행진용 무개차의 운전도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여성에게 맡겼다.
이런 세대교체와 여성의 진출은 2019년 말 칠레를 뒤흔든 사회적 폭발 이후, 기성 정당, 기성 정치, 기성세대에 대한 깊은 불신과 근본적 변화를 원하는 시대적 열망의 결과다. 지난 대선에서 극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가 패배한 것도 결국 시대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새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새로운 정치 세대로 꼽히는 보리치 대통령부터 기성세대와 확실히 다르다. 팔에는 큼지막한 타투를 했고 결혼은 안 한 채 여자친구와 산다. 취임식 뒤 대통령궁 첫 연설 때조차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재임 기간에 살 집도 기존의 대통령들이 살던 부촌이 아니라, 서민층과 이민자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동네의 고택을 골랐다. 그가 바란 대로, 평범한 시민들의 삶터 한가운데 최고 통치권자가 함께 살아간다.
새 정치 주역들은 칠레 사회 안에서 꾸준히 성장해왔다. 보리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인 바예호 장관, 34살의 조르조 잭슨 정무장관은 20대 후반인 2014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해왔다. 2011년 벌어진 대규모 교육개혁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의 집권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한국과는 다른 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한국처럼 관계중심적 집단주의 문화가 아니어서 학번도 기수도 안 따진다. 그래서 칠레에서 ‘선배’ ‘후배’라는 한국어를 설명하기 힘들다. ‘나이 많은 게 벼슬’도 아니고, 느닷없이 ‘너 몇살이야?’를 묻지도 않는다. 칠레 친구들 집에 가보면,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저리 가서 놀아라’ 하는 문화가 없다. 초등학생이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하고, 어른들은 가르치려 들기보다 일단 들어준다.
이제 새로운 정치 세대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호소하는 객체가 아니라, 정책 결정권을 쥔 주체로서 국가의 내일을 그 세대의 시각과 해법을 갖고 설계하고 있다. 물론 칠레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줬다’ ‘젊어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비판과 우려가 남아 있다.
출범한 지 한달이 안 된 보리치 대통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50%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30대 대통령과 청년 내각이 국정을 이끄는 칠레의 미래가 궁금하다. 한국의 새 내각 구성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