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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공학도와 세월호

등록 2022-04-07 14:57수정 2022-04-08 02:39

2014년에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세월호 참사를 접했던 학생들이 이제 대학생이 되어 세월호를 찾아갔을 때 그곳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고통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모두 2014년 4월16일 자신이 무엇을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2일 목포신항만에서 정성욱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부서장(고 정동수군 아버지)이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세월호 선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전치형
지난 2일 목포신항만에서 정성욱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부서장(고 정동수군 아버지)이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세월호 선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전치형

전치형ㅣ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4월2일 오전 카이스트 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목포대교를 건너고 있을 때 오른쪽 창 너머로 심하게 녹슨 배 한척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서 있는 배였다. 배가 서 있는 현장 입구에 도착하자 단원고 고 정동수군의 아빠인 정성욱씨가 노란 상의를 입고 우리를 맞으러 나와 있었다. 주변에는 노란 리본들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수 아빠와 나는 정권이 바뀌는 것이 세월호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잠시 얘기했다. 학생들은 미리 제출한 명단에 서명하고 동수 아빠를 따라 세월호를 향해 걸어갔다.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두주 앞두고 목포신항의 세월호 선체를 찾은 우리에게 동수 아빠는 배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선체 진입을 위해 설치한 계단을 올라가니 차량 갑판인 D갑판이 먼저 나왔다. 한자리에 모여 짧은 묵념을 하고 배 뒤편의 계단을 따라 타기실로 내려갔다. 동수 아빠는 물속의 타를 좌우로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타기 펌프 장치를 설명했다. 타기실과 그 옆 구역을 이어주는 맨홀이 열려 있는 것도 주의 깊게 보라고 알려주었다. 한 구역을 채운 바닷물이 빠르게 다른 구역으로 퍼져 침몰을 앞당겼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역시 차량 갑판인 C갑판으로 올라와서 동수 아빠는 최초로 물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또 차량을 싣지 않도록 되어 있던 경사로에 차량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학생들은 선체 방문 전에 각자 예습한 내용과 동수 아빠의 설명을 맞춰보면서 세월호라는 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스트 학생들의 마음이 가장 길게 머문 곳은 단원고 학생들이 있었던 객실이었다. 차량 갑판보다 위에 있는 B갑판, A갑판을 차례로 지나며 우리는 이곳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음을 상기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써 차분하게 설명하는 동수 아빠 앞에서 우리 일행은 차마 상상하지 못할 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고 동수 아빠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당시 선내를 울리던 ‘가만히 있으라’ 안내 방송을 떠올려보거나 객실에서 몇걸음쯤 움직이면 배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는지 눈으로 가늠해본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배의 운항을 책임진 이들이 모여 있던 조타실 앞까지 둘러본 뒤 현장 관리자들의 안내를 받아 배를 빠져나왔다.

학교로 돌아와 얘기를 나누어보니 세월호를 본 학생들의 정서적 반응은 다양했다. 비교적 담담하게 선체를 주시하고 관찰할 수 있었던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공간의 무게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일정을 마쳤지만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은 경험인 듯했다. 2014년에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세월호 참사를 접했던 학생들이 이제 대학생이 되어 세월호를 찾아갔을 때 그곳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고통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모두 2014년 4월16일 자신이 무엇을 하다가 그 소식을 들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들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왔다.

한 학생이 왜 우리에게 세월호 선체를 보여주려 했냐고 물었다. 나는 왜 굳이 카이스트 학생들을 데리고 세월호에 가보려 했던 것일까. 아무리 기술적인 내용에 관심이 많고 이해를 잘하는 이공계 학생들이라고 해도 선체를 한번 보는 것으로 대단한 진실을 새로 발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히려 텅 빈 채로 녹슬어가고 있는 선체 앞에서 공학도로서 무력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충분한 지식과 경험과 의지가 있는 전문가들이 힘을 합하면 세월호 진상규명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당연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미 그런 전문가들의 노력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다음 세대의 전문가가 될 학생들이 세월호를 냉소나 체념이 아니라 여전히 관심과 질문이 필요한 대상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다.

오후가 되어 우리가 현장을 떠나려 할 때 우리보다 더 많은 대학생 일행이 선체를 참관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다짐하는 조끼를 맞춰 입고 왔다. 동수 아빠는 점심도 거른 채 방문자들을 또 입구에서 맞이하고 인솔했다. 참사 후 8년, 이제 동수보다 어린 세대가 세월호를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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