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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이를 업고 영화를 만들다

등록 2022-04-07 18:01수정 2022-04-08 02:39

[나는 역사다] 박남옥(1923~2017)

그저 영화가 좋았다. 배우가 좋고 촬영 현장이 좋았다. 영화 공부가 하고 싶어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다. 그래도 꾸준히 영화 일을 했다. 전쟁 중에는 돈이 벌릴까 하여 어린이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살기 좋아진 지금도 아이들을 위해 참고서 이외의 책을 사준다는 개념이 없는 나라에서 전쟁 통의 피난지에서 예쁜 그림동화책이 팔릴 리가 없었다”.

1954년에 박남옥은 영화감독이 되었다. 요즘도 만들기 힘들다는 독립상업영화다. 친언니의 돈을 받아 제작비를 댔다. 제작사 이름이 ‘자매영화사’라고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녹음실을 빌리고 홍보와 배급까지 직접 뛰어야 했다. 남자들이 맡지 않으려는 일도 박남옥의 몫이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박남옥이 직접 갓난아이를 업고 촬영장에 나왔다. 배우와 촬영진의 식사도 박남옥이 챙겼다. 가끔은 사 먹였지만 보통은 밥과 반찬을 손수 지었다.

촬영 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남성 스태프가 다른 지방의 남성 스태프에게 촬영기를 빌려주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돌려받지를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급한 박남옥이 직접 촬영기를 찾아왔다. 아이를 업고 무거운 촬영기를 든 채 사람 가득한 기차에 실려 “반쯤 왔을까 할 때, 등 뒤의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주로 남자 승객들이었는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뭐 하고 있어!’ 영화가 뭐길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관객 반응은 나쁘지 않았나 보다. 1955년 봄, 사나흘 상영하는 동안 “극장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못 보았다”. 하지만 돈이 벌리지는 않았다. 지방 배급과 홍보를 해주겠다며 수고비만 챙기고 잠적한 사기꾼도 있었다.

나중에 영화잡지를 창간하고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해 배우들과 추억을 남기기도 했지만 박남옥은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한동안 참고서와 백과사전을 만드는 출판사 일을 했다. 유학 간 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해 여생을 보냈다. 세상을 떠난 날이 2017년 4월8일이다. 따님이 자서전을 정리해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의 삶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영화 <미망인>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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