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프레거, <스타 슈즈>, 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롯데뮤지엄 ‘알렉스 프레거, 빅 웨스트’전 제공
[크리틱]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진과 영상 작업을 하는 미국의 예술가, 알렉스 프레거가 찍은 군중 사진에는 언제나 주위보다 살짝 밝은 조명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모으는 개인이 있다. 가령 <스타 슈즈>라는 작품에서는 노란 옷을 입고 안경을 쓴 여성이 도드라진다. 관람자는 무심코 이미지를 보다가 문득 조명을 받은 이 여성을 발견하게 되고,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작가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포착했지만, 군중이라는 덩어리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의상과 행동, 그리고 소품까지 치밀한 계획하에 연출해서 제시한다. 일상 속 개인이 마치 배우처럼 영화 같은 한 장면을 연기하는 것이다.
본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동시다발적인 여러 이야기가 집결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느냐에 따라 무대 위의 주인공이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자기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는 주인공일 것이고, 인생이라는 각자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다양한 감정들일 것이다. 프레거는 무심한 듯 그러나 정교하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티브이(TV)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도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었다. 1990년대 말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시대를 배경으로 풋풋한 주인공들이 슬픔, 기쁨, 행복, 좌절이라는 감정을 겪어내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극 중 인상적인 대사는 “널 가져야겠어”였다. 이 대담한 고백은 주인공 나희도(김태리)가 운명의 연인 백이진(남주혁)에게 외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게 했던 그 대사는 몇 회 후 백이진이 힘들어할 때 나희도가 안아주며, “난 네 거 다 나눠 가질 거야. 슬픔, 기쁨, 행복, 좌절, 모두. 그러니까 반드시 내 몫을 남겨 놔”로 연결되었다.
예쁜 사랑을 키워가던 이진과 희도는 각각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이에 동네 자그마한 터널 앞에서 서로 지쳐버린 모습으로 서투른 이별을 하게 된다. 세월이 제법 흐른 후 잃어버린 그 시절의 일기장을 우연히 되찾은 희도는 뭔가 두고 온 것이 생각난 듯 터널로 달려간다. 그곳에는 상처 입은 과거의 희도가 있고, 또 터널 입구에 축 처진 어깨로 쓸쓸하게 서 있는 옛 이진의 뒷모습이 환영으로 남아 있다. 추억 속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지 못한 채 마음 어디선가 아픈 상처로 떠돌고 있는 그 순간을 드디어 정면으로 마주하며 희도는 비로소 스물다섯의 이진을 떠나보낸다.
‘널 가진다’는 의미도 최종회에서 잘 마무리되었다. 정말로 내가 간직할 수 있는 ‘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그 시절의 나였다는 것이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이별이 아름답거나 괜찮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상대와 나누었던 시간을 소중하게 내 것으로 새겨두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이별의 순간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기억 속 아무 곳에나 파묻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심리에세이 <좋은 이별>의 저자 김형경은 지적한다. 좋은 이별이란, 이별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과거로 다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애도인데, 김형경은 이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성장기에 만나게 되는 각종 크고 작은 이별의 상황에서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내면의 자아는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게 되고, 어른이 된 후에도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단다.
프레거의 사진과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겉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교차점이 있다. 인생은 희로애락으로 가득 찬 이야기라는 점에서다. 하나의 감정을 잘 해결해야 다음 단계로 순탄하게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