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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범선의 풀무질] 페미니즘과 레볼루션

등록 2022-04-17 18:05수정 2022-04-18 02:38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수평과 수직. 수평적인 관계는 평등하다. 협력형, 파트너십 문화가 생긴다. 수직적인 관계는 불평등하다. 위계적인 지배형 문화를 낳는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야말로 인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다. 수평이냐 수직이냐에 따라 문화 전반이 결정된다.

지난 오천 년 동안, 젠더 관계는 수직적이었다. 홀로세가 도래하여 기후가 안정되자 인류는 농경을 시작했다. 정착하여 문명을 건설했다. 잉여 생산물과 사유 재산이 생겼고, 가부장제가 자리잡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다. 문자 기록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가부장제는 공고화됐다. 역사시대, 즉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인류는 지배형 문화를 구축했다. 남과 여로 나누고 둘을 수직적으로 배치했다. 농경과 정착, 재산과 문자가 남성중심사회의 기틀이다.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것은 육천 년 전이고, 환웅과 웅녀가 만난 것은 사천 년 전이다. 서양과 동양 모두 대략 이때부터는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했다. 하느님 아버지, 단군 할아버지를 섬겼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은 당연히 남성이었다.

역사 이전, 선사 시대에는 어땠을까? 농경과 정착, 재산과 문자 이전에는 달랐을까?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환인 전에 마고가 있었고, 제우스 전에 가이아가 있었다. 인류는 하늘의 아버지 이전에 대지의 어머니를 공통적으로 숭배했다. 정착하지 않고 유목하던 시절, 글로 남기지 않고 말로 전하던 시절, 남는 것을 가지지 않고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비교적 사회가 작고, 수평적이었다. 여성과 남성이 조화를 이뤘다. 지배형 문화가 소유와 권력, 감시와 처벌로 사회를 유지한다면 협력형 문화는 공유와 연대, 믿음과 돌봄으로 사회를 지탱한다.

모든 정치사상은 태곳적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실낙원, 잃어버린 파라다이스, 쫓겨난 에덴동산을 꿈꾼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이후 진보 운동의 방향은 분명했다. 자유롭고 평등했던 원시 시절로 돌아간다. 농경과 사유 재산으로 인한 불평등 이전의 수평적 관계를 회복한다.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회복해야 한다. ‘혁명’이라고 번역하는 ‘레볼루션’은 원래 돌아간다는 뜻이다. 천체의 공전처럼, 계절의 순환처럼, 인류의 역사도 돌고 돈다. 프랑스 혁명은 수직적인 시대가 가고 수평적인 시대가 다시 온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권리를 인민에게 나누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즉 여성권과 동물권 역시 프랑스 혁명의 인권이 확장된 것이다. 거대한 회전의 일환이다.

역사는 끝났다. 사상 처음으로 글보다 말이 중요하다. 유튜브의 시대, 텍스트의 헤게모니는 막을 내렸다. 선사 시대처럼 구비 문학이 유행한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는 말조차도 무용하다. 그림과 춤, 심상으로 소통한다. 우리는 모두 디지털 노마드다. 정주하지 않고 유목 생활을 영위한다. 원시의 부활, 원시반본이다. 역사의 밑동으로 회귀한다. 공유 경제와 기본소득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피어싱과 타투, 로큰롤과 힙합도 마찬가지다. 문명 이후 터부시되었던 문화가 되살아난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전환의 핵심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지배에서 협력으로, 정복에서 조화로 나아가는 변혁이다. 하늘의 아버지에서 대지의 어머니로, 태풍이 불던 여름을 지나 열매를 맺는 가을로 간다. 밀물이 차올랐다가 비로소 썰물이 빠진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한 기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맞는다. 수직적인 가부장제 사회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 자연과 인간의 파트너십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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