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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일기도가 들려주는 소리

등록 2022-05-01 15:09수정 2022-05-02 02:37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센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오면 쉬익쉬익하는 소리가 난다. 바깥 공기가 유입되면 실내 공기에 파문이 일고, 용수철처럼 공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며 기압이 출렁인다. 이 기압의 파동이 귓속으로 들어와 청각 세포를 자극한 것이다.

공기가 없다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정거장 사고로 주인공이 미아가 된 장면에서는 영화음악마저 숨을 죽이는데, 소리 없는 우주 공간이 더욱 적막하게만 느껴진다. 대기가 충만한 지구에서 자연의 소리는 물론이고 관현악의 화성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폭풍우가 가까이 오면 남풍이 보드라운 손으로 나뭇잎을 흔들어 깨운다. 그러다가 빗방울이 맨땅과 창문을 두드리면, 드럼을 치는 소리가 난다. 수만 종류의 타악기가 다양한 톤으로 우두둑 소리를 내면, 비구름이 코앞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비가 그치고 북풍이 불어대면 점차 풍속이 강해지며 바람 소리가 거칠어진다. 크고 작은 초목에 매달린 나뭇잎이며 나뭇가지가 세차게 떨리며 새어 나오는 소리는 자연이 연출하는 관악기 합주다.

하지만 폭풍우가 불러오는 기압의 변화는 소리로 감지할 수 없다. 이런 부류의 기압 파동은 음파와 달리 파의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진동하므로 고막을 자극하지 못한다. 대신 예보관들은 사방 몇 킬로미터 간격으로 촘촘히 배치한 기압계를 읽어, 폭풍우가 만들어낸 공기의 떨림을 일기도에 그린다. 그리고 소리로 들을 수 없는 대기의 리듬을 머릿속에서 재현해낸다.

일기도에는 파도타기처럼 기압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출렁이며 이동해간다. 폭풍우가 몰려오면 기압이 서서히 낮아진다. 가까이 다가와 비가 내리고 나면, 잠시 주춤하다 한바탕 소나기가 내린다. 그러고는 기압이 빠르게 높아지며 날이 회복된다. 관측 지점마다 폭풍우의 다른 단면을 보고 있기에, 그 정보를 종합해 기압 파동을 그려보면 폭풍우의 크기, 강도, 이동 속도와 방향을 분석할 수 있다.

폭풍우가 지나가면 으레 비바람이 몰아치지만, 매번 똑같은 경우는 없다. 어떤 때는 얌전히 비가 내리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낙비를 거칠게 쏟아붓는다. 그런가 하면 거센 바람을 몰고 와 비닐하우스를 모조리 쥐어뜯어 놓는 경우도 있다. 폭풍우마다 독특한 날씨 패턴을 보이는 게, 사람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가진 것과 흡사하다. 처음 일기도를 봤을 때는 어제 일기도나 오늘 일기도나 비슷해서 뭐가 다른 건지 찾아내기 어렵다. 하지만 반복해서 일기도를 보다 보면 폭풍우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제각기 다른 기압 파동의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음악도 자주 듣다 보면 악기의 음색이 절로 구분되듯이, 폭풍우마다 다른 음색이 느껴지는 것이다.

공기의 떨림을 소리로만 듣는 것은 아니다. 스피커에 손을 대보면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올 때마다 손에 뭔가 자극이 느껴진다. 피부가 음악을 느끼는 순간이다. 쉴 새 없이 스피커의 떨림판이 진동하며 공기를 흔들어대고 그 압력이 다양한 리듬으로 피부를 두드린다. 헬렌 켈러도 설리번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입술에 손을 대서 떨리는 진동을 느껴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폭풍우가 접근하면 기압이 낮아지는 걸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몸이 팽창하는 힘을 받으며 다양한 생리 현상이 일어난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지거나 무릎 관절이 쑤시기도 한다. 심지어는 산모가 때맞춰 자연분만하기도 한다. 다시 기압이 높아지며 찬 공기가 내려오면 혈압이 상승하기도 하고, 꽃가루가 실려 와 기관지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렇듯 공기의 떨림을 체감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들리지 않는 것을 몸으로 느껴보고 마음으로 그려볼 때, 우리는 대자연이 펼쳐 보이는 리듬과 음색의 향연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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