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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통령 관저와 여주 영릉

등록 2022-05-03 04:59수정 2022-05-03 08:05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영릉) 모습. 연합뉴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영릉) 모습.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이주현ㅣ 이슈부문장

지지율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기어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한 명분은 ‘제왕적 대통령제’다. 지난 3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청와대 이전 티에프(TF)’는 한때 ‘청와대에서 일단 근무를 하고 시간을 두고 대통령실을 이전하자’는 속도조절론도 검토했으나, 윤 당선자가 강하게 ‘용산 집무실에서 업무 시작’으로 드라이브를 걸었다고 한다. ‘청와대로 가는 순간 내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찌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는 것이다.

윤 당선자가 그리도 혐오하는 제왕적 대통령제란 무엇인가. 헌법상 한국 대통령은 국가수반인 동시에 행정수반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주정부가 실질적 행정권을 쥐고 있는 연방제 국가라는 점에서 한국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서 행사하는 힘은 더 막강하다. 여기에 수직적 당청관계를 이용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입법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무총리는 공식적으론 행정 각부의 통할감독권과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갖고 있지만, 이런 권한은 실질적으로 대통령에게 귀속돼 있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진다는 의미의 ‘책임총리’가 현행 헌법에서 규정한 국무총리의 실질적 위상이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영남·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 풍부한 정치자금, 당 총재로서의 공천권 행사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했지만, 이 폐해를 잘 알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권-대권 분리를 선언하며 공천권을 포기했다. 대통령직 수행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르겠지만,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에 따라 ‘제왕적이지 않은 길’을 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제왕적 대통령’이 될까 봐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윤 당선자는 정작 취임식도 하기 전부터 제왕적 대통령이 될 조짐이 보인다. 당무와 선거 개입 논란이 대표적이다. 윤 당선자는 국민의힘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김태흠 의원을 불러 충남지사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윤 당선자의 측근인 권성동 의원의 유력한 원내대표 경쟁자로 손꼽혔던 김 의원은 고심 끝에 충남지사행을 택했고, 이로써 권 의원은 손쉽게 원내대표에 올랐다. 당내 경선 토론회에서 윤 당선자를 집요하게 비판했던 유승민 전 의원이 경기지사 도전을 선언하자, 인수위 대변인이었던 김은혜 의원이 급작스레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한 것도 윤 당선자의 ‘자객 공천’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과 전국을 도는 것 역시 ‘벌써부터 선거 개입이냐’는 논란을 낳고 있다.

누가 봐도 제왕적 대통령의 행태라는 우려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이전 과정에서 제기됐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더니 별다른 사전 설명 없이 국방부를 새 대통령 집무실로 선택하고, 청와대 개방도 당선자가 정한 일정대로 ‘10일 0시’로 밀어붙였다. 느닷없기로는 관저 선정이 심각하다. 김건희씨의 외교부 장관 공관 방문이 논란이 되자 허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실제로 거주할 당선인의 배우자가 후보지를 둘러보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했는데, 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 부부’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발언이다. 대통령이 정했으면 그만이지 무슨 토를 다느냐는 식이다.

후임 외교부 장관 공관을 정하지도 않은 채 ‘뷰가 좋은’ 외교부 공관으로 대통령이 밀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주 영릉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15세기 말 조선 예종은 세종대왕릉 천장지를 물색하던 중 광주 이씨 소유지가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에 따라 이씨 문중 산소를 이장시키고 세종대왕릉을 옮겼다고 한다.(‘여주시사’ 누리집 참고) 워낙 길지에 왕묘를 썼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됐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설’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백성의 묫자리를 뺏는 무리수가 무에 대수였을까.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조선시대 왕과 달리 한국의 대통령은 임기가 고작 5년인데다, 그마저도 제왕적 권력을 재직기간 내내 휘두를 수 없다. 민주화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권력누수가 일어나기 시작해 말년엔 레임덕에 휘청거렸다.

역대 초박빙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어느 때보다도 낮은 지지율에서 출발하는 윤 당선자. 국민은 애초부터 그에게 제왕적 대통령의 그 어떤 조건도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좋겠다.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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