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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열린 세계는 가능한가

등록 2022-05-04 18:04수정 2022-05-05 02:07

독일 뮌헨대학에 있는 ‘하얀 장미’ 전단 기념 조각. 위키피디아
독일 뮌헨대학에 있는 ‘하얀 장미’ 전단 기념 조각. 위키피디아

김민형 |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올해 4월 프랑스 대통령 선거 기간 즈음 파리 남부의 고등과학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당연히 여러 점심시간의 대화는 정치적인 잡담이었고, 모든 후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히 2차 선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과 마린 르펜을 놓고 던진 표는 페스트와 콜레라 사이에 뭘 고르냐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마크롱이 58.5%를 득표해 재선했지만 2017년 득표율 66.1%에 비하면 극우파로 간주하는 르펜의 부상이 놀라웠다. 유럽 정치적 담론의 구심점인 이민 문제가 르펜 세력의 점진적 증가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선거 뒤엔 독일 뮌헨의 아르놀트 조머펠트 이론물리연구소를 방문했다. 연구소가 있는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는 15세기에 세워졌지만 19세기 뮌헨으로 옮겨온 뒤 지어진 건물들은 그 당시 바이에른 왕이었던 루트비히 1세의 취향을 대변하는 신고전주의와 로마네스크 건축이 주류를 이룬다. 독일 국민주의의 낭만적 기반이 됐다고 할 만한 문화유산들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독일이 이어받았다는 신화적인 이데올로기가 도시 중심 전경에 스며들어 있었고, 특히 왕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레오 클렌체가 지은 조각 박물관은 바이에른 남부의 디즈니랜드식 창조물 노이슈반슈타인성 수준의 판타지를 실현한다. 클렌체는 루트비히의 아들 오토가 그리스의 왕으로 즉위하자 아테네에서 오토만제국 건축물들을 제거하며 도시를 유럽 낭만주의의 상상 속 고전양식으로 재구축하는 작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뮌헨이 히틀러의 사랑을 받는 도시였다는 것이 쉽게 이해된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 독일 역사는 더 극단적으로 왜곡됐지만, 그런 성향의 초기 버전을 19세기 뮌헨 건축의 발자취에서 찾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뮌헨 대학 본관 건물에는 나치 세력에 저항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기념관도 있다. ‘하얀 장미’로 알려진 저항운동은 1942년 조피와 한스 숄 남매 주위로 학생 다섯명과 교수 한명이 주동이 돼 나치 독재를 비판하는 전단을 여섯편 발행해 학생들이 정부에 대항하도록 선동했다. 그 여섯명은 모두 체포돼 1943년 숄 남매와 크리스토프 프롭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기념관은 이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이념과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책자와 동영상 여러개가 전시돼 있고, 하얀 장미 발행물들을 그 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기념관 밖 중앙홀에는 주동자들의 모습이 새겨진 동판이 대리석 벽에 걸려 있고, 그 앞에는 가느다란 꽃병 안에 흰 장미가 하나 꽂혀 있다. 물론 홀 자체는 낭만적 신고전주의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영웅적인 양식이다.

프랑스에서는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 사건’을 계기로 반이민 정서가 강해졌다. 성역 없는 풍자로 유명한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만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흉한들이 들어와 직원 12명을 살해한 비극은, 프랑스 전역에 이슬람 근본주의의 위협에 경각심을 가지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진보진영에서조차 이민자에게 경계심을 표현하는 일은 흔해졌고 ‘프랑스 가치관’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그런데 같은 해 여름 앙겔라 메르켈이 이끌던 독일 정부는 1년 남짓한 기간 난민 100만명가량을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당시에는 나와 친한 진보적인 독일 교수들조차 이 계획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감소 전망에 시달리던 독일 정부는 과감하게 ‘개방’ 정책을 관철했다. 7년이 지난 지금 몇번의 난관을 거쳤지만 독일 이민정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난하게 독일 사회에 적응해가는 이주민들 이야기가 자주 미디어에 보도되고 있으며, 은퇴 직전인 2021년 말 메르켈은 세계 어느 지도자보다도 높은 82%라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일본의 개화기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2년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외국인이 그 나라 땅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적국의 시민이 나라를 사버리면 어떡하나,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권의 여러 자치국은 수없이 많은 전쟁 끝에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상태였다. 그런 정치적 여건 속에서도 서로의 땅을 사고팔 수 있었다. 문화적 교류 역시 빈번했다. 지금의 유럽과 동아시아가 함께 되새겨볼 만한 근대사다.

뮌헨 대학에서 만난 이론물리연구소 한 연구원은 자기 주위 젊은이들의 생각이라며 이런 말을 해줬다. 어떠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국경이라는 개념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믿지 않는다고. 독일 국가주의의 상징이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서 하얀 장미의 혼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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