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수도 리마에서 지난달 5일(현지시간)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카스티요 대통령이 물가 급등 항의 시위를 막기 위해 리마와 인근 카야오에 통행금지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리마 EPA/EFE=연합뉴스
[통신원 칼럼]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지난 2일 칠레의 한 티브이(TV) 저녁 뉴스. 앵커 2명이 빵, 달걀, 아보카도 등이 실린 대형마트 카트 2개를 각각 잡고 방송 스튜디오에 섰다. 2019년과 2022년 사이 물가 상승을 다루는 특집보도에서, 진행자는 “생활비가 계속 오르기만 합니다”라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같은 돈을 써서 식료품이 잔뜩 실린 2019년이라고 쓰인 카트와 훨씬 적게 실린 2022년 카트를 나란히 비교하며, 2019년만큼 식료품을 채우려면 지금은 거의 50% 돈을 더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기준 1년간 물가상승률은 9.4%다. 2008년 이후 최고치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새로운 뉴스는 아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정권의 안정까지 위협하고 있다. 페루가 대표적이다.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은 부패 스캔들에 물가 폭등까지 겹치면서 취임 9개월여 만에 임기도 못 채울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온다. 페루 정부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유류세 인하, 빵 등 필수 식료품에 대한 한시적인 면세 등 대책을 내놨다. 최저임금도 약 10% 인상했지만, 뛰는 물가도 악화한 민심도 잡지 못하고 있다. 3월 말 기준, 지난 1년간 물가상승률이 6.82%에 이르러 1998년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시골 교사 출신의 카스티요 대통령은 부패한 우파 정치세력에 맞서 당선되며 ‘좌파 개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미 두차례나 탄핵 위기에 내몰렸다.
고질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온 아르헨티나는 “최소한 아르헨티나에 안 살지 않느냐”며 위안으로 삼으라는 기사 제목이 붙을 정도다. 지난 1년간 물가상승률이 55.1%나 치솟아,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지난 3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브라질도 최근 1년간 물가상승률이 11.3%나 된다. 2003년 이후 최악이다. 10월 대선을 앞두고 치솟는 물가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연임을 위협하고 있다.
연금의 중도인출을 세차례 허용했던 칠레는 추가 인출이 의회에서 추진되다가,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행정부의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이를 놓고, 서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배신했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물가는 치솟았는데, 코로나 위기 때 이뤄졌던 정부의 한시적인 현금성 지원은 중단되면서 불만은 커지고 있다.
칠레에서 ‘극좌파’로 분류되는 보리치 대통령의 지난 3일 발언은 물가 안정을 위해 긴축재정 정책을 펴야 하는 각국 정부의 고민을 잘 드러낸다. 그는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칠레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 문제가 정부의 직접적인 이체(현금성 지원)만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며 “오늘의 빵이 내일의 배고픔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르헨티나를 언급하면서, “재정적인 측면에서 무책임한 나라들은 파산하고 국가의 지원이 만성화되면 경제를 왜곡하고 국민에게 더 손해를 끼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며 코로나 사태가 한창일 때처럼 현금성 지원을 계속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해당 기사에는 보리치 대통령이 ‘표변했다’ 등의 비난이 이어졌다. 지난 1일 발표된 그의 지지도는 치안 악화 등의 문제까지 겹쳐, 취임 두달도 안 돼 24.2%로 떨어진 상태다.
인플레이션이 닥치면 저소득층이 더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처럼 빈곤율이 높고 빈부격차가 큰 지역에서는 민심이 좌우 이념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따라 더 크게 움직인다. 코로나 팬데믹은 안정세에 접어들었지만,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라틴아메리카 정권을 위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