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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앞선 고민을 마주하며

등록 2022-05-05 18:07수정 2022-05-06 02:37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이사한 집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난데없이 창틀에 뚫린 조그만 구멍이며, 바로 옆 벽을 두고 굳이 먼 벽의 정중앙으로 통하는 에어컨 배관, 다 열리지 않는 창문까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전 세입자의 흔적은 새로 입주한 나에게 흔적 수만큼의 고민을 안겨주었다. 구멍을 메꾸지 않으면 벌레가 들어올 텐데. 배관은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입주 뒤 딱 사흘을 살아본 뒤로 고민은 모두 사라졌다. 창틀에 뚫린 조그만 구멍은 통신선이 통하는 길목이었고 배관은 벽의 구조상 그 부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집 외부 사정으로 인해 창문은 다 열지 않는 게 오히려 이득이었다. 나의 뒤늦은 고민은 이 집에 먼저 살았던 누군가가 치열하게 고민해준 덕에 말끔히 해결되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발붙인 채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은 앞서 여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호등 하나를 설치하려 해도 관련 기관이 모여 어느 곳에 설치하는 게 적절할지, 좌회전을 단독으로 빼는 게 나을지 비보호 좌회전으로 지정해 수시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을지, 초록불 점등 시간은 몇초로 할지 가지각색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들이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신호등 설치로 이전보다 단 한걸음이라도 편하게 통행하고 통행 흐름도 빠르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어디 신호등 설치하는 일처럼 명확한 정답이나 눈에 보이는 값이 딱 나오겠는가. 더욱이 교통시설은 전문가들이 논의를 거쳐 설치하는 데 반해 각자의 삶은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고민’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애를 태움’이듯, 인생은 고민으로 하얗게 불태운 밤의 재로 채워지는 것만 같다. 고민을 거듭한다고 꼭 좋은 방향으로만 전진한다는 보장도 없다. 나빠지는 것은 한순간인데 좋아지는 데는 한 세월만 같아 너무 손해 보는 장사로까지 느껴진다. 재만 남은 밤의 주변을 배회하다 매캐한 재를 들이마셔 기침하고, 계속 콜록거리다 눈물이 고이고, 뭐 그런 밤들만 한 트럭이다. 내 삶이 정말 나아지고 있기는 한 걸까. 나아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나,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2005년에 개봉한 영화 <이대로, 죽을 순 없다>의 주인공 이대로처럼 정말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그럴 때, 이젠 나아질 출구가 없다고 느껴질 때, 불현듯 앞서간 이들의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대형 스포츠 브랜드에서 발이 불편한 사람들이 손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운동화를 출시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경사가 극심한 달동네에 거주하는 어르신들과 교통약자들을 위해 시에서 무료 모노레일을 설치해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앓고 있는 질병 때문에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대체품이 속속 나오고 있는 걸 마트 한가운데서 목도했을 때, 내가 지녔던 한낱 고민들이 만만해도 너무 만만한 고민이었다.

1988년 도입된 장애인등급제는 2019년 7월 폐지되어, 획일적인 등급 대신 ‘장애 정도’로 구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당 제도가 있던 시절, 자신의 등급 재심의나 확정 등의 행정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직접 주민센터를 방문해야 했다. 그럴 때는 우리 집에서 엄마가 전화기를 붙들고 오열하곤 했다. 걷지도 못하는 애 혼자 주민센터를 방문해야 한다고요. 못 걷는다니까요. 아니, 애가 못 걷는다고요. 서른이 넘었는데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가요. 장애가 있으니 그렇게 사는데, 장애를 증명하려면 센터를 가야 한다니요. 담당 공무원은 절차가 그렇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공무원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절차를 바꾸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당사자가 애를 태웠을지 알 수 없다.

더 나은 모두의 삶을 위해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고민은 무엇일까. 일단 이게 가장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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