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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크라이나의 자유, 어산지의 자유

등록 2022-05-08 18:06수정 2022-05-09 02:36

지난 1월2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고등법원 앞에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지지자들이 팻말을 든 채 그의 미국 송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지난 1월2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고등법원 앞에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지지자들이 팻말을 든 채 그의 미국 송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우리의 시선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돼 있던 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뉴스가 하나 있다. 지난달 20일, 미국에서 간첩법 위반 행위로 기소됐던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미국으로 송환하도록 하는 판결이 내려졌다는 보도다. 이날 영국 법원은 어산지 범죄인인도를 공식 승인했고, 현재 프리티 파텔 영국 내무장관이 서명하는 절차만 남아 있다.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어산지는 최장 징역 17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우리는 서구의 자유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라는 개념이 지닌 한계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신호 하나는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사건이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 인수가 문명의 전환점이 될 것이고, 트위터를 민주주의를 위한 신뢰할 만한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며 “최대한 신뢰받으면서 많은 것을 포용하는 공공플랫폼을 만드는 것은 문명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트위터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어떤 플랫폼이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는지 시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주요 공유자원 중 오직 기업이라는 사유재(심지어 이 경우는 한 기업인)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곳이 됐단 말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 자유가 신봉건주의(neo-feudalism)에 의해 수호되는 시대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좋고 싫음이라는 의견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다뤄도 상관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본인권, 교육, 의료에 관한 진실이 과연 그런 문제에 해당하는가?

우리는,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를 지지하고 있는 지금,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제1막 마지막 부분. 돈 조반니가 ‘자유 만세’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힘껏 ‘자유 만세’를 합창한다. 모두가 자유를 외치며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신분과 계급의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며 자유에 투사하고 있는 것은 실은 서로 다른 꿈과 희망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모든 그룹이 ‘자유’라는 동일한 주인 기표를 중심으로 결합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그룹이 이 보편성에 서로 다른 의미를 투사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 말이다. 자유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어떤 이들은 재산권의 자유를, 어떤 이들은 국가의 법에 종속되지 않을 아나키적 자유를, 어떤 이들은 개인이 어떤 그룹을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이야기한다.

물론 자유는 그 윤곽이 역사에 따라 크게 변화해 왔으므로 자유의 지배적인 개념이 지닌 깊은 역사성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극도로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전통 사회의 경우 자유는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이 맡은 특정한 역할을 제약 없이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근대 사회의 경우 자유는 추상적이고 법적인 평등 및 개인 자유권과 연결된다(이 맥락에서 가난한 노동자와 부유한 고용주는 동등하게 자유롭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자유가 최소한의 복지, 무상 교육, 보건의료와 같은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점점 더 연결됐다.

이제 오늘날은 자유의 강조점이 이른바 “선택의 자유”에 놓인다. 그렇게 되면서 우리는 바로 그 선택의 틀이 개인에게 어떻게 부과되는지의 문제를 간과하게 되고, 선택이 사실상 특권적이라는 점을 놓치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자유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자유롭게 탐문해야 한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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