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편집국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윤석열 대통령이 광주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국민의힘 의원·지도부 100여명, 새 정부 장관들, 대통령실 참모들과 함께 참석해 손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그는 기념사에서 “오월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고 했다. 보수 정권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 수뇌부가 광주로 총출동해 오월 정신을 기린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윤 대통령은 5·18 유족들에게 해마다 기념식에 오겠다고 했다 한다. 윤 대통령이 광주 방문으로 “최고 수준의 통합 행위”를 했다는 대통령실 참모들의 설명도 과장은 아니다.
이런 윤 대통령이, 당선 뒤 가장 엄숙한 자세로 집중해서 준비했을 취임사에는 왜 ‘통합’을 빼놨던 걸까. 몇몇 국내외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렇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통합하겠습니다 … 여야를 넘어 대화의 문을 활짝 열겠습니다. 국회와 협력하고, 사법부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통합만이 성공을 향한 길이고, 통합 없이는 평화가 없습니다. 나를 지지한 사람들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나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순서대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그리고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극심한 분열과 갈등 속에 대선에서 승리한 만큼, 더더욱 ‘통합’을 취임사에 힘주어 담았다.
하지만 0.73%포인트 차라는 역대 최소 격차로 겨우 당선한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통합’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자유”, “반지성주의”, “세계 시민 여러분”이 강조됐다. 또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사에서 국가균형발전(노무현), 대한민국 선진화(이명박), 국민행복(박근혜), 권력기관 독립(문재인) 등 핵심어를 제시하면서 정치·경제·외교안보 등 각 분야에 걸쳐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지만, 윤 대통령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취임사를 했다.
아차 싶었는지, 윤 대통령은 취임식 이튿날 기자들이 묻기도 전에 “취임사에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뒤늦게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동·연금·교육 개혁을 과제로 제시하면서 “의회주의”와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고, 18일 광주 방문으로 통합 메시지를 내놨다.
더 지켜볼 일이지만, 그가 지금까지 보여온 모습은 ‘통합’ 의지에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여야가 국회의장 중재를 거쳐 각 당 의원총회에서 추인까지 받은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 합의를, “검수완박은 부패가 완전히 판치는 부패완판이라는 생각에 변함없다”는 메시지를 통해 단박에 뒤집었다. 그는 ‘미완의 국회 합의’를 존중하고 여야·시민사회와 함께 허점 보완에 주력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다수당(더불어민주당)을 막지 못할 바에야 의회 합의를 걷어차는 쪽을 선택했다. 윤 대통령은 왜곡된 성 인식으로 여당 안에서도 비판이 일고 있는, 오랜 검찰 인맥인 윤재순 총무비서관에 관해 기자들이 묻자 “다른 질문 없나”라며 외면했다. 그는 18일 광주를 방문해 통합을 외쳤지만 현재까지 윤석열 정부 장관, 대통령실 수석 21명 중에 호남 출신은 단 1명, 여성은 3명뿐이다. 국회에 협치를 호소하고 광주를 방문하는 것 이상으로 윤 대통령이 무엇으로 통합을 실천하겠다는 건지 의문이다.
자기편 챙기기도 벅찬 확증편향의 시대에, 통합은 더더욱 어려운 과제다. 통합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도자마다 취임 일성으로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더구나 앞으로 2년은 지속될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민 지지와 야당 협조 없이 윤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싫어한다는 ‘쇼통’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나 보여주기보다 진정한 실천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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