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히스패닉을 겨냥한 미국의 인종차별 폭동

등록 2022-06-02 18:05수정 2022-06-03 02:40

[나는 역사다] 주트 수트 폭동(1943년 6월)

전쟁이 터지면 후방의 삶도 변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도 그랬다. 젊은 백인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 일자리가 비었다. 여성과 흑인과 히스패닉(멕시코계 미국인)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일자리를 얻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흑인과 히스패닉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백인들 살던 동네에 유색인종이 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백인 남자들이 자기네 사회가 위협받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농촌에 살던 흑인들이 도시에 살러 왔다. 1940년대에 히스패닉 이민자가 늘었다. 미국 이 도시 저 도시에 흑인과 히스패닉이 사는 동네가 생겼다. 멋부리기 좋아하는 히스패닉 젊은 남자들은 신기한 옷차림을 했다. 그 옛날 미국의 ‘날라리 패션'이랄까. ‘어깨 뽕'을 넣은 헐렁한 윗도리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챙 넓은 모자를 썼다. ‘주트 수트'라는 차림새다.(그 무렵 흑인 청년 맬컴 엑스도 주트 수트를 입었다고 한다.)

젊은 백인 남자들은 본때를 보이기로 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주둔하던 미군 백인 병사들이 날을 잡아 히스패닉 동네에 들이닥쳤다. 주트 수트를 입은 히스패닉 청소년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두들겨 패고 머리털을 자르고 옷을 벗겨 찢고 불태웠다. 이른바 ‘주트 수트 폭동'이다. 1943년 6월3일부터 네댓새 동안 백인들은 도시 곳곳에서 히스패닉 청년들을 습격했다. 옷이 벗겨진 채 거리에 팽개쳐진 청년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경찰은 (백인의 폭력을) 거의 막지 않았다. 히스패닉이 이에 맞서 싸우려 했을 때 경찰이 출동해 이들을 체포했다.” 역사학자 앨런 브링클리의 글이다. 그때 영부인은 엘리너 루스벨트(훗날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했다). 진보적이었던 그는 주트 수트 폭동이 인종차별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많은 백인이 모르는 체했다. 지역 언론은 도리어 엘리너 루스벨트가 좌파라며 이념공세를 폈다.

그해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흑인과 백인의 싸움이 나 흑인 수십명이 죽임을 당했다. 인종차별 폭동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 나는 늘 두렵다.

김태권 만화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크리틱] 마르틴손 사건 / 김영준 1.

[크리틱] 마르틴손 사건 / 김영준

혐오에 꺾이는 학생인권조례 2.

혐오에 꺾이는 학생인권조례

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 [아침햇발] 3.

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 [아침햇발]

[사설] ‘라인 사태’ 선 넘는 일본, 윤 정부 대일 ‘저자세 외교’ 탓은 아닌가 4.

[사설] ‘라인 사태’ 선 넘는 일본, 윤 정부 대일 ‘저자세 외교’ 탓은 아닌가

[사설] ‘채 상병 특검’ 국회 통과,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말아야 5.

[사설] ‘채 상병 특검’ 국회 통과,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말아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