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삼행시

등록 2022-06-12 19:23수정 2022-06-13 02:38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어매요, 지녁에 다시 깔 낀데 머할라꼬 아츰마다 이불을 개니껴?”

애 있는 집마다 아침에 이불 개는 걸로 실랑이를 벌인다. 깔든 개든 어차피 이불은 그대로이니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도 아주 틀리진 않다. 이불 개기와 비슷한 게 줄임말이다. ‘혼밥, 칼제비, 썩소, 별다줄, 답정너’ 같은 줄임말은 재미있긴 해도, 본딧말이 있다는 점에서 원본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다. 별걸 다 줄여도 답은 본딧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마음속에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가출은 할지 모르지만 출가는 못 한다. 줄임말도 본딧말의 담을 타넘지 못한다.

하지만 말을 ‘펼쳤다 접었다’만 거듭하면 얼마나 따분한가. 말소리와 뜻이 압착되어 화석이 되는 걸 그냥 둘 순 없지. 삼행시. 한 덩어리였던 말을 쪼개고 거기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나열함으로써 견고한 말을 단박에 흐물흐물하게 만들기. 겉은 오징어이지만 속엔 두부, 채소, 나물, 당면, 쇠고기가 들어앉은 오징어순대처럼, 쪼개진 낱말에 예기치 못한 말들을 이어 붙인다. 예컨대, ‘소나기’는 ‘[소]방차가 불난 집 불을 끈다. [나]는 신나게 구경했다. [기]절했다. 우리 집이었다.’로, ‘아파트’는 ‘[아]파트로 이사 갔다. [파]란색 아파트였다. [트]림했더니 무너졌다.’로 바뀐다.

재치와 순발력을 뽐내는 말장난 정도로 취급받지만, 삼행시가 갖는 언어철학적 무게는 가볍지 않다. 말은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 의식과 존재도 새로운 관계와 배치 속에서 달라진다는 것.

줄임말은 원본(본딧말, 집)을 잊지 못하지만, 삼행시는 원본을 찢고 예측 불허의 삶을 산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