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어매요, 지녁에 다시 깔 낀데 머할라꼬 아츰마다 이불을 개니껴?”
애 있는 집마다 아침에 이불 개는 걸로 실랑이를 벌인다. 깔든 개든 어차피 이불은 그대로이니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도 아주 틀리진 않다. 이불 개기와 비슷한 게 줄임말이다. ‘혼밥, 칼제비, 썩소, 별다줄, 답정너’ 같은 줄임말은 재미있긴 해도, 본딧말이 있다는 점에서 원본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다. 별걸 다 줄여도 답은 본딧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마음속에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가출은 할지 모르지만 출가는 못 한다. 줄임말도 본딧말의 담을 타넘지 못한다.
하지만 말을 ‘펼쳤다 접었다’만 거듭하면 얼마나 따분한가. 말소리와 뜻이 압착되어 화석이 되는 걸 그냥 둘 순 없지. 삼행시. 한 덩어리였던 말을 쪼개고 거기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말들을 나열함으로써 견고한 말을 단박에 흐물흐물하게 만들기. 겉은 오징어이지만 속엔 두부, 채소, 나물, 당면, 쇠고기가 들어앉은 오징어순대처럼, 쪼개진 낱말에 예기치 못한 말들을 이어 붙인다. 예컨대, ‘소나기’는 ‘[소]방차가 불난 집 불을 끈다. [나]는 신나게 구경했다. [기]절했다. 우리 집이었다.’로, ‘아파트’는 ‘[아]파트로 이사 갔다. [파]란색 아파트였다. [트]림했더니 무너졌다.’로 바뀐다.
재치와 순발력을 뽐내는 말장난 정도로 취급받지만, 삼행시가 갖는 언어철학적 무게는 가볍지 않다. 말은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 의식과 존재도 새로운 관계와 배치 속에서 달라진다는 것.
줄임말은 원본(본딧말, 집)을 잊지 못하지만, 삼행시는 원본을 찢고 예측 불허의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