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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

등록 2022-06-16 18:02수정 2022-06-17 02:36

미얀마 등 아시아 국가들, 중동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의 대우에는 명백히 이중기준과 불균형이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난민의 고난을 경시하는 게 아니다. 그 몇배나 되는 수의 개발도상국 난민들의 고통과 눈물에는 세계가 너무나 냉혹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는 인도적 위기에서조차 자신들의 이해를 우선한다. 말할 것도 없이 ‘지원’이나 ‘원조’조차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이종구, <속 농자천하지대본-연혁>, 1984년, 쌀부대 위에 아크릴 물감, 170×100㎝,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종구, <속 농자천하지대본-연혁>, 1984년, 쌀부대 위에 아크릴 물감, 170×100㎝,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5월29일, 2주 남짓 한국 체류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왔다. 약 3년 만에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참석하고 서울에서 두차례 북토크를 여는 것이 주목적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번 도항은 출입국 모두 꽤 힘들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써보려 한다.

먼저 동행한 아내는 일본 국적이어서 한국 입국에 비자가 필요했다. 과거 여러번 비자 없이 왕래한 적 있는 아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비자를 요구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꽤나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호적등본을 비롯해 혼인관계증명서 등 몇가지 서류를 요구하는 바람에 많은 시간과 품을 들여야 했다. 그밖에 비행기 탑승 48시간 안에 피시아르(PCR) 검사를 받고, 영어나 한글로 된 공식적인 ‘음성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도 받았다. 그래서 도쿄의 클리닉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는데, 비용이 1인당 2만5천엔(약 24만원)으로 비쌌다. 귀로에도 나리타공항에서 피시아르 검사를 받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렸다.

또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일본 쪽에서도 한국 쪽에서도 이런 절차를 모두 스마트폰으로 처리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쓸 줄 모르면 자기 나라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단 말인가. 젊은 친구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그 난관을 통과했으나, 나 같은 고령의 아이티(IT·정보기술) 난민에게는 마치 국경을 넘는 이동이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또 이런 절차의 각 단계에서 집요하게 ‘개인정보’를 입력하는 ‘등록’을 요구하는 것도 심한 위화감을 갖게 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쪽은 코로나 재난을 기화로 이처럼 방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일반인들은 설사 납득할 수 없더라도 요구받는 대로 개인정보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절차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마치 권력에 의해 ‘알몸’이 되는 듯한 굴욕감마저 나는 느꼈다. 덧붙이자면, 이런 절차의 제도화 이면에 막대한 이익을 보는 기업이나 개인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즉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국가가 일단 선언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쉽게 ‘주권 없는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보수파가 헌법을 개악해 ‘긴급사태’ 조항을 도입하려는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물론 전쟁이나 기타 이유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고난에 비하면 내가 느낀 불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내게 또다시 ‘국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였다. 피곤했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7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화(戰禍)를 피해 국외로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에서 비교적(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후한 대우를 받고 있으나, 시리아 난민들은 그렇지 못해 노골적으로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된 게 기억에 새롭다. 미얀마 등 아시아 국가들, 중동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난민과 우크라이나 난민의 대우에는 명백히 이중기준과 불균형이 존재한다. 나는 우크라이나 난민의 고난을 경시하는 게 아니다. 그 몇배나 되는 수의 개발도상국 난민들의 고통과 눈물에는 세계가 너무나 냉혹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국가는 인도적 위기에서조차 자신들의 이해를 우선한다. 말할 것도 없지만, ‘지원’이나 ‘원조’조차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곡물을 비롯한 자원의 보고이자 전략적 요충이기도 한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구미와 러시아가 치열한 세력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냉전 종결 뒤에도 형태를 바꿔 계속되고 있는 투쟁이 지금 이념도 이상도 잃어버린 채 치열하게 분출하고 있다.

서울과 인천에서 3년 만에 그리운 사람들과의 재회를 기뻐했다.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나는 ‘전쟁과 예술’이란 제목의 강연을 하면서 참고 영상으로 소련 영화 <맹세한 휴가>(‘병사의 발라드’, 1959)와 <불 628>(‘컴 앤 시’, 1985)을 소개했다. 왜 지금 ‘소련 영화’를 보는가.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참조할 만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전자는 스탈린 시대가 마침내 ‘해빙’을 맞은 1959년에 공개돼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안보조약 반대운동 이후) 일본에서 많이 봤다.(아마도 그 시대의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고교 시절에 이 영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소련의 ‘국책영화’로서 비판해야 할 점이 있지만, 전쟁 속의 휴머니즘 찬가로 그냥 ‘국책영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컴 앤 시’는 1943년 나치 독일 시절 베를린이 무대. 1943년 3월22일 하티(학살) 사건을 토대로 한 알레시 아다모비치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 두편의 영화는 같은 독소전쟁 시대, 거의 같은 장소를 다루고 있으나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정반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지옥’이라 일컬어졌던 독소전쟁의 진실을 철저히 묘사했다. 영화사상 가장 암울한 영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내가 강연에서 의도한 것은 이런 영화들을 ‘국책’이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또 ‘어차피 국책영화’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리지 말고 오늘의 세계라는 문맥 속에 다시 놓고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보는 관점을 갖자는 것이었다. 여론도 문화 경향도 쉬 일색화하기 쉬운 오늘날과 같은 ‘전쟁’ 상황 속에서 자립한 주체로서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밖에 나 개인으로서 큰 수확은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인 이종구 화백을 만나 그 작업실에서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이 화백은 나와 거의 같은 세대로, 출신지가 내 조부모와 같은 충청남도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1960년대 처음 찾아간 고향의 가난하고 피폐했던 풍경과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가 읊은 세계이기도 하다. 조부대에 일본에 건너가는 바람에 ‘디아스포라’가 된 나와, 변함없이 고향 농민들을 계속 그리고 있는 이종구 화백의 세계는 완전히 대칭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나를 강렬하게 잡아끌었다. 무엇보다 밤낮없이 논밭을 갈듯 농민들의 진실을 계속 그려 온 그 삶이 내 가슴을 때렸다. 그런 사람이 문화재단 대표로 있는 것은 분명 소중한 일이다. 그것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민주화투쟁의 과실이다. 지난 대통령선거 이후의 문화정책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는 중요한 분기점에 다다랐다. 지금까지의 귀중한 성과가 과연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까. 나는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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