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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구 끝까지 대통령 교통신호만 잡을 텐가

등록 2022-06-22 18:19수정 2022-06-23 02:38

윤석열 대통령 차량 행렬이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를 지나 용산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차량 행렬이 지난달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를 지나 용산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김남일 | 사회부장

김광호 신임 서울경찰청장의 기자간담회 뉴스를 지하철에서 읽다가 웃고 말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생각보다 웃음소리가 컸을 것이다. 지하철 민폐다. 이 정도로 사람을 웃길 수 있다면 다른 일을 했어도 잘됐을 분이다.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크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두고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반드시 사법처리하겠다”니, 세계경찰을 꿈꾸시는 분을 겨우 서울경찰청장에 쓰는 건 윤석열 정부의 직무유기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불과 몇 정거장을 이동하기 위해 그 몇 배의 시간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장애인들을 지구 반대편까지 찾아가 잡아오겠다는 것은, 몸 불편한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의도된 조롱인가. 김 청장이 더 잘 알겠지만 경찰권 행사는 법률에 근거하고, 인권존중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한마디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가 남긴 교훈이다. 경찰권 행사로 보호되는 공익이 경찰권 행사로 침해되는 사익보다 커야 한다. 신체접촉을 동반한 물리력 행사는 최후 수단, 최소 한도에 그쳐야 한다. 물리력은 현장의 위험 정도에 비례해 사용돼야 한다. 자동차 경적 빵빵거린다고 권총을 뽑으면 어쩔 것이며, 침 뱉었다고 물대포를 쏠 일도 아니며, 금연구역 어겼다고 최루탄을 터뜨릴 이유도 없으며, 흉기 휘두르는데 말발로 해결하겠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천만 영화 <범죄도시2> 주인공 마석도 형사가 영화 초반 흉기를 휘두르는 범죄자를 제압한 뒤에도 흠씬 두들겨 팬 것은 보기에는 시원해도 공권력 남용이다. 현실이었다면 영화 속 경찰서장이 경찰 폭력을 비판한 한겨레신문을 집어 던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례성 원칙은 물리력 행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정된 수사력을 사안의 경중에 맞게 배분하는 것은 경찰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이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다. 중범죄에는 강한 수사 의지와 수사력이 필요하지만 정치가 해결할 영역은 최대한 비워두는 것이 맞다. 이동권 시위가 지하철 승객들의 지각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아까운 경찰력을 설마 지구 끝까지 투입하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윗사람 한마디에 밤새워 수사하는 게 경찰 조직이다. 다만 검사들은 수사권이 지구 끝까지 갔다 오는 왕복 항공권이냐며 웃고 있을 것이다. 경찰력 낭비에 따른 배임죄가 가능한지 따져보고 있을지 모른다.

경찰 내부에서는 김 청장 발언을 두고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극악한 성범죄자 수사에서 각오를 다질 때나 쓰는 말을 버스와 지하철 안전하게 타보자는 장애인들에게 쓰는 게 상식 밖이라는 것이다. 차기 경찰청장은 아직 미정이다. 지구 끝까지는 기자나 국민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외치는 불굴의 의지였을 수 있다.

김 청장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 발언은 징후다. 누군가 먼저 뒤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뒤처질세라 나머지 전체가 돌아설 것이다. 여야 정권교체 때마다 봐왔던 익숙한 장면이다. 줄 세우는 정권만 탓할 일도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행정안전부 장관 밑으로 경찰 조직을 끌어다 붙여도, 시·도 경찰청장급인 치안감 인사를 발표하고 불과 2시간 만에 “희한한 일”이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번복해도, 경찰 높은 자리를 꿈꾸는 모든 이들은 당연한 권리라며 묵비한다. 검찰 조직을 스타일러처럼 흔들고, 검사장급 인사를 바둑돌로 알까기 하듯 했다면 검찰이 어떻게 나왔을지 생각해보라. 오늘의 침묵은 앞으로 검찰 정권에서 경찰이라는 조직이 어떤 위치에 있게 될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경찰들은 지각하지 말라고 윤석열 대통령의 출근길을 열어주기 위해 매일 교통신호를 잡는다. 편히 가시라고 퇴근길에도 많은 경찰력을 투입한다. 교통 막힘이 거의 없다며 경찰의 일사불란함을 공치사한다. 지구 끝까지라도 신호를 잡아 길을 뚫어주려는 정성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위해서라면 용산 잔디밭까지 뒤지겠다는 스케일을 경찰에게 바라지 않는다. 다만 어마어마한 수사권을 넘겨받고도 교통신호 잘 잡고, 지하철 정시운행에 매진하는 것이 경찰의 주된 일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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