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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지연의 교훈

등록 2022-06-30 18:24수정 2022-07-01 02:36

(발사) 지연은 누리호 프로젝트의 결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리호 팀이 그동안 쌓아온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정시에 발사하는 것 못지않게 돌발적 지연에 대응하는 것도 오래 손발을 맞춘 이들의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 지연에서 교훈을 얻어 사고를 막는 것이 최상의 실력이다.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지난 6월21일 오후 4시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 제2발사대에서 우주를 향해 발사되고 있다. 고흥/사진공동취재단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지난 6월21일 오후 4시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 제2발사대에서 우주를 향해 발사되고 있다. 고흥/사진공동취재단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엊그제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 이메일이 왔다. 종종 있는 출발시간 변경 안내인가 하고 열어봤더니 경영진이 고객 전체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경영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거의 사라졌던 항공여행 수요가 최근 빠르게 증가하면서 이를 감당해야 하는 항공업계의 역량과 자원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고백했다. 팬데믹 동안 인력과 운항을 모두 최소로 줄였던 항공시스템이 팬데믹 이전에 가까운 수준으로 복귀하는 데에는 수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린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멈추다시피 했던 시스템을 회복하는 동안에는 예전만큼의 신뢰도, 정확도, 편리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한마디로 당분간 꽤 많은 운항지연과 승객불편이 예상되니 양해를 구한다는 얘기였다.

왜 앞을 내다보고 인력을 유지하지 않았는지 따지는 마음이 들면서도, 격납고에 들어가 있던 비행기를 꺼내 기름을 넣고 시동 버튼을 누른다고 바로 항공편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예약, 발권, 조종, 승무, 정비, 화물 등 모든 영역을 맡았던 사람들이 돌아와야 하고, 이들이 그동안 약해진 감각을 회복하면서 서로 손발을 맞춰야 하고, 모든 업무가 다시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팀이 빈틈없이 작동해야만 정해진 시간에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시스템이 서서히 재가동되는 동안 발생하는 지연 현상에서 우리는 평소 시스템을 정시에 안전하게 굴러가게 했던 수많은 사람과 조직의 존재를 확인한다.

성공적으로 끝난 누리호 2차 발사에도 지연이 있었다. 애초 예정된 발사 하루 전인 6월15일에 산화제 탱크 레벨 센서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발사를 연기했다. 다행히 센서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을 다시 점검한 뒤 21일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오승협 발사체추진기관개발부장은 최종 발사를 앞두고 한 브리핑에서 센서 문제로 인한 발사 지연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며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발사 일정 잡을 때 예비일을 포함한 날짜로 잡는 이유다. 발사 디데이 잡아서 진행하는 과정, 새롭게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많은 연구원들이 의기소침하거나 좌절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거쳐야 할 길이다. 이런 부분이 우주 발사체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라 생각한다.”(<동아사이언스> 보도) 이 지연은 누리호 프로젝트의 결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리호 팀이 그동안 쌓아온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정시에 발사하는 것 못지않게 돌발적 지연에 대응하는 것도 오래 손발을 맞춘 이들의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지연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를 알리는 전조나 경고가 되기도 한다. 5월19일 아침 장항선 철도 신례원역에서 있었던 운행지연 소동은 큰 사고가 될 뻔한 일을 막아낸 사례였다. 이날 이른 새벽 선로전환기 및 신호설비 개량 작업을 하던 시공사가 오류를 조치하는 과정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선 두개를 서로 다른 단자에 바꿔 끼웠고,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작업을 마무리했다. 6번 선로로 열차를 유도해야 할 신호가 7번 선로로 유도하도록 잘못 설정된 것이다. 결국 이날 아침 7시께 무궁화호 열차가 진입하다가 6번이 아닌 7번 선로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상제동했다. 7번 선로에는 이미 반대 방향에서 다른 열차가 진입하고 있었으니 비상제동이 없었다면 충돌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급히 멈춰 서긴 했으나 이미 선로전환기를 지나쳤기 때문에 열차를 몇백m 뒤로 이동한 다음 6번 선로로 바꿔 다시 들어와야 했다. 예정 도착시간에서 20여분 지연됐다. 사고 아닌 지연으로 끝나서 다행이지만, 선로전환기 작업과 시험 과정에서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철도 관제시스템 유지와 운용에 조직적·구조적 문제는 없는지 질문하게 된다.

누구나 지연 없는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이용하고 싶겠지만 ‘정시’라는 목표가 있는 한 ‘지연’ 또한 시스템의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다. 지연은 시스템의 현재 상태와 문제를 알려주고 시스템의 본질을 드러낸다. 시스템의 성능과 안전은 지연을 완전히 없애거나 숨기는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지연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사람과 장비와 경험을 갖춤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 지연에서 교훈을 얻어 사고를 막는 것이 최상의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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