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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가사의 열매를 찾아, 음악의 숲으로

등록 2022-07-03 17:54수정 2022-07-04 02:35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크라잉넛’ 기타리스트 이상면이 먼저 읽고 그리다.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얼마 전 작사 제의를 받았다. 평소 크라잉넛의 노래를 만들지만, 가끔 외부에서도 작사, 작곡 요청이 들어온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갑자기 공연과 방송 일정이 많이 잡혀 무척 바쁜 시즌인데, 일주일 만에 두곡을 작사해야 하는 급한 요청이었다. 살짝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나를 불러준 것에 감사하고, 존경하는 선배님의 곡이기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사실 창작이라는 것은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 가사는 부산 공연을 마치고 느긋하게 한잔 걸친 뒤 숙소 불을 끄고 달빛에 비친 해운대 바다를 보면서 썼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여유를 부리며 작업할 시간이 없다.

일단 제의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갑자기 들이닥친 공연들과 방송 출연에 따른 긴장감,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님의 곡을 작사해야 한다는 무게에 짓눌려 지옥을 헤매는 단테와 같았다고 하면 좀 허세이고, 커다란 숲속을 홀로 헤매는 기분이었다.

작사 제의는 “음악이라는 커다란 숲에서 아름다운 가사 열매를 따 오시오”라는 요청 같았다. 이에 나는 “4분짜리 무대도 조명도 없는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만들어보겠습니다”라고 프로 가사 심마니처럼 호언장담했었다.

귓속에 이어폰을 꽂자 커다란 음악의 숲이 펼쳐졌다. 멀리서 바라봤을 땐 그 숲이 그저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첫날 밤이 다가왔다. 아직 그렇게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상쾌한 음악 바람과 달과 별빛의 낭만을 즐겼다. 예쁜 돌멩이도 보이길래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낭만을 즐기다 보면 가사 열매가 눈앞에 나타나겠지? 그렇게 며칠 동안은 숲의 낭만을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마감 날짜가 다가와도 가사 열매는커녕 그 어떤 열매의 모습도 보이지가 않았다. 순간 깨달았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나무들은 기괴하게 엉켜 있어 마치 나를 잡아먹으려는 형상 같았고, 저 멀리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패닉이 되어 아이처럼 울고 싶었으나, 울어봤자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래시계 알갱이들이 케틀벨처럼 쿵쿵 떨어지고 시계 초침 소리가 대포 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멋지게 “심, 봤, 다!”라고 외치고 유유히 숲을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미노스의 미궁 같은 숲에서 살아 나오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감이 사흘 정도 남았을 때, 작은 샘을 발견했다. 샘 주위에서 사슴이 술 냄새를 풍기며 취해 쓰러져 잠든 모습을 보고 ‘이 샘물은 새들이 놓친 열매들이 빠져 자연 발효로 술처럼 된 거구나!’라고 자연스레 알아차렸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고 “이 샘물을 마시면 혹시 내비게이션 효과가 생겨서 가사 열매를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몰라!”라는 헛된 기대감에 미친 듯이 마셔댔다.

그 뒤 사흘 동안 비틀거리고 맨바닥을 뒹굴며 몽상의 길을 헤맸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깨지는 소리가 나서 손을 넣어보니 무슨 돌멩이가 있었다. 일주일 전에 주웠던 예쁜 돌멩이가 바닥을 구르며 깨졌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깨진 돌멩이 안에 가사 열매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일주일 전 스케치해둔 가사가 다시 보니 열매 같은 느낌이었다는 거다.

난 그 돌멩이 열매를 빛이 날 정도로 닦았다. ‘예쁜 돌멩이 열매라!’ 나머지 다른 한곡 작사를 위해 결국 마지막 날, 그 샘터에 가서 샘물을 한잔 마신 뒤 주위에서 가장 예쁜 돌멩이를 집어 들고서 커다란 바위에 던졌다. 그렇게 얻게 된 돌멩이 껍질 안 열매를 정성스레 윤기가 날 정도로 문지른 뒤 숲을 빠져나왔다.

그 숲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이 나는 것은 그토록 낭만적이던 달빛이 무겁게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큰 산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져온 것이 가사 열매인지 그저 돌멩이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며칠 동안 숲에서 경험했던 시간과 돌멩이들은 빛이 나고 있다. 며칠 동안의 모험을 다독여주고 싶다. 여기저기 영감을 찾으러 방황하며 남루한 행색이 됐지만, 좋은 여행이었다고. 미지의 숲으로 떠나는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적어도 시도는 해봤다고.

혹시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술도 마셔보고, 낯선 동네도 거닐어봤다. 치과 치료를 받는 1시간30분 동안 영감이 스쳐갈까 봐 이어폰을 꽂고 있기도 했다. 소중한 경험들이 남았다고 스스로 말해본다.

가사 쓰기란 마치 음과 감정으로만 힌트가 이루어진 십자말풀이 같다. 너무도 어려운데 재미있다. 분명 정답이 있을 것만 같다. 영원히 풀리지 않기도 하겠지만….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음악같이 정답을 알 수 없는 길, 각자만의 가사와 의미를 새겨 넣으며 걸어가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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