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박미향 | 문화부장
핑클의 노래 ‘블루레인’은 애창곡이다. 손님에게 마이크가 허락되지 않는 라이브 바에서도 애잔한 감상이 몰려오면 눈치 없이 가사를 읊조렸다. 바닥난 감성지수를 끌어올리는 데는 ‘블루레인’의 축축한 노랫말만 한 게 없었다. 가사가 혈관을 돌 때마다 옥주현이 떠올랐다. 가창력은 멤버 중에 가장 뛰어났지만, 대중의 관심은 화려한 이효리와 예쁘장한 성유리, 이진에게 몰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가수. 그런 그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지난 17년간 뮤지컬 무대에서 대체 불가 ‘티켓파워 원톱’으로 자리잡은 모습은 갈채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최근 뮤지컬 <엘리자벳> 캐스팅을 두고 ‘인맥 캐스팅’ 논란에 휩싸이면서 뮤지컬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과 친분 있는 배우를 더블캐스팅하기 위해 힘을 썼다는 것. 과거 갑질 논란까지도 불거졌다. 사실이라면 아이러니하게도 불공정 게임에 옥주현이 앞장선 셈이다. 논란에 불을 지핀 김호영을 고소하는 등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급기야 지난달 22일 뮤지컬 전업배우 1세대인 박칼린, 최정원, 남경주 등이 호소문까지 내자 옥주현은 고소를 취하하고 사과문을 냈다.
전업배우 1세대는 호소문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위치와 업무에서 지켜야 할 정도가 있다”며 “배우, 스태프, 제작자가 지켜야 할 정도 3가지”를 제시했다. 옥주현은 ‘인맥 캐스팅’ 의혹은 여전히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제작사 이엠케이뮤지컬컴퍼니가 밝힌 “라이선스 뮤지컬 특성상 원작자 승인 없는 캐스팅은 불가”하다는 게 이유다. 실제 원작자 로베르트 요한손과 통화했다는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원작자가) 영상 등으로 오디션을 투명하게 봤다”고 전했다.
‘인맥 캐스팅’ 사실 여부를 떠나 옥주현은 억울할 수 있다. 방송을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이른바 ‘꽂아주기’ ‘(톱스타) 패키지 상품’이란 말이 돈 지 오래다. ‘(이경)규 라인’ ‘유느님(유재석) 라인’ ‘나영석 사단’이란 말이 버젓이 오르내리는 게 현실이다.
사실 추천이 문제 될 것은 없다. 공정성이 얼마나 확보됐느냐가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뮤지컬 업계가 다급하게 짚어야 할 점은 따로 있다.
국내 뮤지컬 시장은 2000년대 들어 매년 20% 이상 성장해 팬데믹 직전 매출 규모가 4000억대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최초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가 초연된 1960년대엔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수입 라이선스 뮤지컬이 우리 시장을 키운 듯 보이나,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 <대춘향전> <새우잡이> <빠담빠담빠담> <베르테르> 등 수십년간 꾸준히 제작돼온 우리 뮤지컬이 발전의 근간이다. 하지만 대중성 확보엔 다소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장에 변곡점이 된 건, 2000년대 들어 아이돌 스타들이 뮤지컬계로 넘어오면서다. 본격적인 스타 마케팅이 가능해졌다. 이들이 뮤지컬 업계 권력을 장악하는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 기존 소속사나 기획사들의 불공정한 행태도 이식되기 시작됐다. 이른바 ‘스타 갑질과 월권 행위’ 말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케이(K)팝 무대와 달리 수백명이 공동 작업하는 협업 창작 예술이다. 배우 이외에도 프로듀서, 음악감독, 작곡가, 안무가, 무대감독 등 여러 영역의 전문가가 참여한다.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의 저자 지혜원 뮤지컬 평론가는 “스타 마케팅 의존도가 높은 것은 우리 시장만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라며 “시장 형성기에는 주요하게 작동할 순 있으나, 한계가 분명하다”고 짚었다. 스타 한 사람의 독점적 지위만으로는 질 좋은 작품 탄생이 어렵다는 소리다. 작품이 브랜드가 돼야지, 출연 배우가 극장을 찾는 유일한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세계적인 뮤지컬 <맘마미아>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시카고> 등이 좋은 예다.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엔 다양한 직종의 유니언(조합)이 있다. 이들 조합은 3~5년에 한번씩 프로듀서나 극장주협회와 표준계약서를 작성한다. 극장주의 과점을 막고 공연 환경을 개선하는 등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는 우리 뮤지컬 시장의 압축성장으로 부작용이 드러난 사례다. 향후 뮤지컬계의 질적 도약을 위해선 이 사태를 계기로 합의와 원칙을 세워가는 게 합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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